C707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706화
* * *
내 기강 잡기 18번 대사를 따라 하다가 나한테 들킨 서예현이 필사적으로 나를 피해 다닌 지 어느덧 이틀째.
A&R 팀과 의논할 게 있어서 소속사 사옥에 갔다가 소식 두 개를 전해 듣고, 숙소로 돌아와 또 나를 자연스럽게 피하려 하는 서예현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아, 왜!”
“아, 좀 까딱거리지 말고 똑바로 서 봐.”
“으아아아악! 내 앞에서 그 대사 꺼내지 말라고!”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는지 서예현이 머리를 움켜쥐고 발광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이걸로 형 놀리면 천만 원 준다. 액수에서부터 진정성이 막 느껴지지?”
“1억으로 올리고 그 대사 열 번만 내 앞에서 해 주면 안 돼?”
“이 형이 예전에 막말 한 번에 10만 원으로 재미 좀 보더니 이제 내 선의를 가지고 이제 장사를 하려고 그러네?”
그때 50만 원이나 뜯긴 걸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빡대가리라는 사랑스러운 애칭까지 막말로 우기다니.
하지만 서예현은 내 농담을 받아 주지 않고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재미를 보긴 무슨 재미를 봐. 너 그때 나한테 막말 한 마디도 안 해서 돈 한 푼도 안 줬잖아.”
“어어어? 어, 아. 그랬지.”
서예현의 과거 기억이 통으로 날아간 줄 알고 식겁하다가, 내가 바꾼 과거에서 서예현에게 극한으로 순화한 말만 해 줘서 돈을 한 푼도 뜯기지 않았다는 걸 겨우 기억해 내고 안도했다.
서예현이 혼자 기겁했다가 안도하는 나를 이상한 놈 보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하나씩 있어. 뭐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바로, 서예현이 다음 달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 홍보 공익광고 모델로 선정된 것이다.
선관위에서 연락 왔다고 전해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내가 아니라 서예현이라니!
왜 똑같이 국가 공인 선한 영향력 앰버서더인데 나는 도박이고 서예현은 선거냐고.
“투표 독려는 서바이벌 경력직인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심지어 나는 투표에서 이긴 경력이 있는 사람인데!”
당연히 나를 선택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서예현한테 좋은 소식을 전달해 주다가 갑자기 열불이 나서 펄쩍펄쩍 뛰는 내 옆에서 김도빈이 나를 말리며 나름 진지하게 말했다.
“형이 선거 광고를 맡지 않은 게 차라리 잘된 일일 수가 있어요. 분명히 한 명쯤은 형 도박중독 예방 광고랑 이어 붙여 놓은 영상을 너튜브에 올릴 거라고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인터넷 모니터링 인생 6년이면 그 두 영상이 편집을 거쳐 나란히 붙어서 어떻게 밈화가 될지 훤히 보였다.
투표 안 하면 사람 파묻는 영상이나 되겠지. 이게 다 사감위 때문이다.
제발 선관위에도 그렇게 창의력 넘치는 분이 한 분쯤은 계시길 간절히 바랐다.
“예현이 형 공익 광고도 그런 내용이면 좋겠다.”
“무슨 내용이요?”
“내 인터넷 도박 중독 예방 공익 광고처럼 심오한 내용.”
“투표 장려하는 게 심오할 수가 있어요?”
“왜, 막 <브이 포 벤데타>처럼 그렇게 만들 수도 있잖아. 공익 광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투표의 중요성을 아주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끔.”
“그렇게 만들 거였으면 예현이 형이 아니라 배우를 섭외했겠죠.”
류재희의 시니컬한 대답에도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만약 생각해 내기 어렵다면 내가 시나리오를 짜 줄 마음도 만반이었다.
“삼천포로 그만 빠지고, 안 좋은 소식은 뭔데.”
“형이랑 나한테 예능 섭외가 들어왔어.”
“이게 왜 안 좋은 소식인데?”
“레브에서 우리 둘만 나가는 예능이니까?”
“그러니까… 너랑 나한테 각각 예능 하나씩 들어온 게 아니라 우리 둘이 같이 나가는 거라고? 요리 프로는 아니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 서예현에게 원하던 대답을 들려 주었다.
“일단 장르가 요리는 아니야.”
“그러면 됐어. 그런데 왜 이게 안 좋은 소식이야? 우리가 어색한 사이인데 예능 나가서 억지로 친한 척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서예현에게 의도적으로 말해 주지 않은 예능의 정체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내렸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뭐야, 반응 왜 이래? 뭔데! 무슨 예능이길래 그러는 건데! 설마 머리 쓰는 거 아니지? 내가 또 메인프레임 제8회 최종 우승자 드립을 지겹도록 듣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지?”
나를 붙들고 간절하게 묻는 서예현을 외면하고 류재희한테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막내야, 하준이랑 너랑 한 세트로 프로그램 출연 섭외도 들어왔다더라. 영진이 형이 전달해 줄 거니까 나중에 하준이랑 둘이 그때 듣고. 나도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못 듣고 왔거든.”
“하준이 형이랑 저랑 세트면… 보컬 관련인가? 요즘 버스킹 예능 유행이잖아요.”
“오, 그럴 수도 있겠네. 그거 말 된다.”
김도빈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는요? 저는 아무것도 안 들어왔대요?”
“너는 골라야 할 정도로 들어왔댄다. 소속사 가든지 매니저한테 전달받든지 해서 골라 와라.”
의도하지 않아야지만 웃긴 놈 취급을 받던 녀석이 레브의 예능멤으로 우뚝 서게 될 줄이야.
이전에는 방송 돌려보면서 분석하고 최신 트렌드 다 쫓아가는 류재희가 예능멤 자리도 꿰찰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도빈이 남을 웃기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류재희는 김도빈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막내 라인은 서로를 잘 RESPECT했다.
그건 류재희가 나보다 더 나은 점이었다. 나는 한 번 겪고 나서야 서예현이 나보다 외모 빼고도 더 나은 점이 있다는 걸 겨우 인정할 수 있었는데.
내 대답이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김도빈이 잔뜩 들뜬 채로 2층 계단을 올라갔다.
“대답을 해 봐!”
서예현이 숫제 나를 짤짤 흔들어 대던 그 타이밍에 견하준이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를 발견한 견하준이 잠깐 멈칫하더니 물었다.
“둘이 싸워?”
“싸우다니, 준아. 누가 봐도 하극상을 당하고 있는 가장의 모습 아니야?”
서예현의 손을 가볍게 털어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이상으로는 자기가 맏형이면서도 하극상이라는 말에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서예현도 어느새 내 가장라이팅에 제대로 세뇌된 모양이었다.
“거의 1년 치 비를 오늘 다 맞은 거 같아.”
숙소에 들어온 견하준이 퍽 지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비를 맞은 줄도 모르겠는 상태의 보송보송 건조하기 그지없는 견하준을 훑으며 물었다.
“엥? 오늘 비 왔냐? 이쪽이랑 내 작업실 쪽은 기온만 좀 쌀쌀하고 완전 건조하던데.”
“아니, 진짜로 비가 온 건 아니고, 오늘 드라마 촬영씬이 비 맞으면서 달려가서 우산 사 오고, 지안 선배, 그러니까 여주인공한테 우산 씌워 주면서 나는 비를 다 맞는 씬이라서. 위에서 물 뿌려서 촬영하잖아.”
내가 이제껏 봐 왔던 드라마와 영화의 비 오는 날 씬이 진짜 비 오는 날 촬영한 게 아니었다니.
“현장에서 촬영 끝나자마자 바로 머리 말리고 옷 갈아입긴 했지. 그런데 이 씬이 중요하다고 감독님이 촬영을 몇 번을 반복하는 바람에…”
어지간히 시달렸는지 견하준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제대로 무리한 모양이었다.
“막내야, 집에 감기약이나 해열제 있냐?”
“모르겠어요. 재작년에 제가 감기 걸렸을 때 형들이 사 온 거 남았나 한 번 봐 볼게요. 그런데 1년 훨씬 넘은 약을 먹어도 돼요? 탈 나는 거 아니에요?”
시간이 늦어서 지금 문을 연 약국은 없을 터였다.
“오늘 그런 장면 찍는다고 미리 말해 줬으면 약 미리 사다 놨지. 너는 왜 그런 걸 미리 말 안 하고 그러냐.”
보일러 온도를 높이며 견하준을 향해 투덜거렸다.
“이 정도로 안 앓아누워.”
견하준이 본인의 체력을 과대 평가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래도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지 않은 모양이다.
입술이 지금 창백하게 질려 있는데 무슨 이 정도로 안 앓아눕기는.
그리고 견하준이 회귀 전에 이 드라마 촬영 중에 크게 앓아누워서 겨우 잡혀 있던 단체 예능 스케줄 빠졌던 걸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물 맞고 와서 앓아누운 게 아닌가, 지금 와서 추측해 보고 있었다. 당시의 견하준은 지금처럼 내게 사소한 거라도 다 털어놓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그때도 촬영 중에 무리해서 그랬다고만 들었던가.
해외 명품 브랜드 행사 참석 때문에 새벽 일찍 출국해야 해서 짐을 싸고 있던 서예현이 자기 방문을 빼꼼 열고 불만을 제기했다.
“대체 온도를 얼마나 높인 거야! 여기가 무슨 사우나 불가마야?”
“지금 준이가 밖에서, 이 쌀쌀한 꽃샘추위 날씨에 하루 종일 찬물을 맞고 왔다는데 이 정도 더위도 못 참아? 어?”
눈을 부릅뜨고 윽박지르자 서예현이 바로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아, 그래? 온도 더 높여.”
“여기에서 더 높이면 불가마가 아니라 불지옥이 될 것 같은데…”
입고 있던 파자마 잠옷의 가슴팍을 연신 팔락거리며 김도빈이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날 새벽.
똑똑- 내 방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자 캐리어 손잡이를 쥔 서예현이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야, 하준이 지금 열 제대로 올랐어. 방에서 앓는 소리 나서 내가 문 열고 들어가서 이마를 짚어도 안 깨던데, 물수건이라도 좀 올려놔 줘. 나 지금 나가야 해서 너한테 맡길게.”
이럴 줄 알았다고. 이게 다 과도한 다이어트 때문이다.
사람을 그렇게 단기간에 삐쩍 말려 놨는데 면역력이 안 떨어지고 배기겠는가.
화장실에서 물을 묻힌 수건을 꽉 짜서 견하준의 방으로 향했다. 앓는 소리가 났다는 서예현의 말과 달리, 방은 고요했다.
뜨거운 공기가 풀로 튼 보일러 때문인지 견하준의 몸에서 나는 열 때문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평소였으면 인기척이 나자마자 바로 눈을 떴을 견하준은 침대 위에서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이마에 물수건을 툭 얹어주고 책상 앞의 의자를 침대 옆쪽으로 끌어서 앉는 순간, 어느새 눈을 뜬 견하준과 내 시선이 마주했다.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미소 지은 견하준이 내게 인사했다.
“그때 이후로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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