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706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705화
내가 예상했던 상황은, 저놈이 번호를 딴 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어 온 전화를 받고, 다시는 우리 직속 후배한테 집적거릴 엄두조차 못 내게 기강을 단단히 잡아 주는 거였다.
번호를 주자마자 그 자리에서 전화해 보는 미친놈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말이다.
-이렇게 대놓고 다른 놈 번호를 주는 건, 이건 뭐 사람 등신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선배한테 예의가 이게 뭐예요, 유월 씨.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상황이 도래했다는 걸 눈치챈 멤버들이 잔뜩 설렌 얼굴로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다들 내심 심심했던 모양이다. 하긴, 견하준과 합동한 정이서 전화 참교육도 벌써 작년 일이긴 하지.
-아, 여보세요? 이유월 씨가 그쪽 번호 남한테 막 넘겨 주는 거 알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의 내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는 선명한 악의까지 느껴졌다. 니텐스 리더 면전에서 걸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래도 체면 봐서 점잖게 털어 주려고 했는데, 얘는 안 되겠다.
“당연히 알죠. 제가 제 번호 주라고 했는데.”
느긋하게 대꾸하자 바로 사나운 목소리로 욕설이 박혔다.
-뭐야, 씨발. 남친이야?
“남친은 아니고, 소속사 선밴데.”
-죄송해요, 이든 선배님.
니텐스 리더가 곤란함이 가득한 어조로 수화기 너머에서 내게 사과를 건넸다. 내가 봤을 때 이 사과는 번따남한테 번호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려는 목적이 한 70% 정도였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친 건지, 들으란 듯 1초에 한 번씩 쳐 대던 코웃음 소리도 뚝 끊겼다.
“설마 선배가 전화를 끊지도 않았는데 싸가지 없이 먼저 끊진 않겠죠? 예의 운운하는 걸 내가 다 들었는데.”
저쪽에서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없도록 배수진을 치고 즐거운 기강 잡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놈? 씨발? 우와, 후배님. 네가 내 친구예요?”
다정하게 묻다가 목소리에 서려 있던 웃음기를 싹 지워 내고 정색했다.
“살다 살다 내가 나보다 어린놈한테 놈 소리를 다 들어 보네. 야, 내가 네 친구야?”
-…죄송합니다.
번호 한 번 따려다가 이 지경이 된 게 영 자존심 상하는지 놈이 이를 악물고 내게 사과했다.
“이든아, 지금 방송국으로 쫓아가려고? 참아, 참아.”
“맞아요, 참아요, 형.”
견하준과 류재희는 정작 내가 방송국에 갈 생각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말리는 척 놈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고 있었다.
정이서랑 KICKS, 레브의 삼자대면 이후로, 당시 같이 있었던 후배 그룹이 대체 말을 어떻게 퍼트렸는지 나는 후배들한테 공포의 무언가가 되어 있더라.
우리 네이비 후배들 말로는 내가 정이서를 선 채로 기절시켰다고 소문이 돌았다는데.
하여간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그 소문은 의외로 지금 도움이 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 채로 기절하긴 싫었는지, 곧바로 다급히 더하는 사과에는 방금보다 진정성이 더해진 게 느껴졌다.
“너 때문에 얘들이 휴대폰 압수당하면 책임지고 새 폰 사다 줄래?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문명의 이기를 못 누리고 사는 게 말이 돼?”
레브는 LnL의 시작을 함께한 개국공신이라 소속사에서는 우리를 빡세게 잡지 못했다. 현재 매니저 실장인 영진이 형부터 우리랑 형 아우 하고 지내는 사이인데 말 다 했지.
하지만 우리 후배 그룹인 니텐스는 빡세게 잡았다.
우리가 사고를 막 치고 다닌 일은 없으니, 우리를 반면교사 삼아서 후배들을 단속하는 건 아닌 것 같긴 한데…
아무튼, 한 명이 남돌이랑 연락만 해도 다 같이 휴대폰을 압수당한다는데, 저런 놈한테 번호 적선하고 다섯 명이 싹 휴대폰을 뺏기면 얼마나 억울하고 서럽겠는가.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형. 매니저한테 말하면 바로 우리 후배님들 폰만 압수당했을 텐데. 매니저한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속으로 끙끙 앓았겠어요.”
“아니, 애초에 열애설 나면 니텐스가 욕 더 먹는 거 알면서 번호를 따려고 하냐? 이 새끼 양심 있냐? 같은 업계 동료 커리어에 똥칠을 하려고 하네?”
“애초에 번호 따고 다니는 것부터 양심이 없잖아요. 보니까 그룹 내에서도 유사 팔이 제일 많이 하던데. 그러고 다니다가 팬 기만으로 역풍 맞는 거죠. 그러고 다니는 게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하여간 이런 새끼들은 초심 찾으라고 데뷔 초로 확 보내 버려야 해.”
류재희와 내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번따남을 존나게 갈구는 걸 옆에서 듣고 있던 김도빈도 눈을 빛내며 참전했다.
“제 말이요. 계속 거절했는데도 계속 번호 달라고 집적거리는 것도 사람 등신 취급하는 거 아니에요? 이거 완전 내로남불 아니야?”
“관심이 가면 자기 번호를 줘야지, 번호가 무슨 사냥감이야? 획득하고 다니게? 꼭 자신 없는 놈들이 전화 안 올까 봐 저러더라.”
서예현도 옆에서 슬그머니 한 마디 얹었다.
서예현이 번따남의 면전에서 면대면으로 저 말을 해 줬으면 타격이 지금의 열 배는 되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후배님, 혹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그래? 그러면 방금 뭐라고 했는지 읊어 봐.”
틈틈이 경청하고 있는지 확인까지 해 주며 갈군 지 어느새 10분.
-야, 너 거기서 뭐 해! 우리 이제 무대 올라가야 한다고! 아오, 한참 찾았는데 뭐 하냐?
놈을 찾는 소리가 뒤에서 쩌렁쩌렁 들려왔다. 그래도 무대는 올라가게 해 줘야 하니 슬슬 마무리로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한 번만 더 번호 주라고 강요했다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이제 내가 너를 쫓아다니면서 역지사지를 느끼게 해 줄 거예요. 알았냐?”
-넵! 다시는 번호를 달라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내 말 가득히 담긴 진심을 읽어 낸 건지, 놈이 이제까지의 목소리 중에 가장 결연하고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뭐야? 왜 이래?
같은 그룹 멤버로 추정되는 이의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내 쪽에서 먼저 끊어 주었다.
아무튼, 레브가 전부 갈굼에 참전한 덕분에 내가 무슨 숨겨진 남친이네, 비밀 연애네 하는 헛소리는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비속어가 감지되었습니다.]
[초심도 –2]
우리집 시스템도 정산을 마쳤다. 내가 융통성이 없다고 한 말을 담아 놓은 건지 초심도를 2점밖에 까지 않았다…
…고 감동할 뻔?
생각해 보니 처음에 갈겼던 씨발은 그 후배 놈 말을 따라 한 거지 내가 자율적으로 한 게 아니니까 솔직히 2점을 깎는 건 좀 너무한 처사였고, 새끼는 솔직히 비속어라고 하긴 좀 힘들지.
융통성이 생긴 게 아니라 드디어 세부적으로 계산하는 법을 알아낸 거였다.
[초심도 –6]
이러기야? 우리 방금까지 좋았잖아.
[ㄴ]
삐진 모양이다. 다음에는 융통성이 생겼다고 칭찬해 줘야겠다. 더럽게 까탈스럽네.
초심도가 8점이 깎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90점대라 시스템의 투정 정도로 넘길 수 있었다.
“아쉽다. 만약 면대면이었으면 이든이 형 그 대사 오랜만에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류재희가 아쉬움 그득그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대사?”
“까딱거리지 말고 똑바로 서라-.”
류재희가 진지하게 목소리 깔고 내 기강 잡기 18번 대사를 따라 했다.
“아니야, 류재. 이든이 형은 너처럼 그렇게 막 목소리 안 깔아. 평소보다 한 단계 낮은 목소리라니까.”
불쑥 끼어든 김도빈이 나를 따라 한답시고 자기도 내 18번 대사를 쳤지만, 전혀 똑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까딱거리고 싶은 불량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서예현은 자기도 한 번 끼어들어서 해 볼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기강 잡기 대사가 챌린지 행이 되다니.
“뭔가 하준이 형이 하면 안 무서울 거 같아.”
“아니야, 형. 하준이 형이 의외로 잘 소화할 수도 있어.”
“한 번 보고 싶다. 한 번 보면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니까. 하준이 형이 한 번만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반짝거리는 막내 라인의 눈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견하준이 두어 번 목을 가다듬고선, 정색하며 내 18번 대사를 읊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이든이 형은 이든이 형한테 맞을까 봐 무서운 거면, 하준이 형은 영영 하준이 형 눈 밖에 날까 봐 무서운 느낌?”
“역시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폭력의 위협이 더 무섭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얘들아, 내가 언제 너희 앞에서 사람 팼냐?”
애써 웃으며 어금니 깍 깨물고 물었다.
“에이, 느낌이 그렇다고요, 느낌이.”
이 녀석들이 이제 다들 누울 자리 보고 두 다리 쫙 펴서 눕고 있네.
내가 기강잡기 18번 대사를 저 녀석들 앞에서 정색하면서 쳐도 다들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몸이나 더 대놓고 까딱거리고 있으리란 것에 서예현의 카이사르를 위한 가슴 벌크업 운동 루틴을 건다.
-선배님 덕분에 잘 해결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저녁에 전화로 내게 감사 인사를 한 니텐스 리더는 내게 카페 기프티콘을 거의 10만 원어치를 보내고 바로 채팅방을 나가며 나와의 연락 증거를 인멸했다.
내가 이런 일에 돈 쓰지 말고 너희들이 먹으라고 붙잡기도 전이었다.
그렇다. 나도 연락했을 시 휴대폰 압수 대상이 되는 남돌이었다.
“마치 후배한테 10만 원을 뜯어낸 기분이야…”
“나중에 소속사 사옥에서 만나면 보답해 줘. 그러면 되지.”
휴대폰에 이마를 박고 있자 견하준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우리는 소속사 후배들을 강제 도파민 디톡스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오랜만에 제법 직속 선배다운 역할을 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까딱거리지 말고 똑바로 ㅅ-”
“오.”
부엌에서 물컵을 내려놓고 목소리 깔며 내 18번 대사를 치던 서예현과 내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내심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해한다는 의미로 뻣뻣하게 굳은 서예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서예현이 윤이든병에 걸릴 수도 있지, 암암.
나를 쏜살같이 지나쳐 본인 방으로 들어간 서예현의 방 안에서 퍽퍽! 침대 패는 소리가 났다.
그럴 수도 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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