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704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703화
이게 그저 괜한 기우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차연호가 이런 것에서라도 쓸모가 있어서 다행…
아니다. 지금 차연호의 쓸모를 인정해 주면 안 된다. 정확하게 정보를 물어오고 나서 안도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이런 거라도 도움 되는 놈에서 아무것도 도움 안 되는 놈으로 전락하느니, 아무것도 도움 안 되는 놈에서 도움 되는 게 그래도 하나쯤은 있는 놈으로 격상하는 게 차연호한테도, 그리고 그런 차연호를 회귀라는 비밀을 공유하는 놈으로 둔 내 정신건강에도 더 좋지 않겠는가.
몇 시간 더 작업을 하다가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숙소로 향했다.
오늘은 견하준이 촬영하는 케이블 수목드라마 <시간 너머의 봄>의 첫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프로젝트 맞선> 때까지만 해도 숙소 거실에서 우리와 함께 1화를 시청했던 견하준은 이제 배우들 및 촬영팀과 다 같이 모여서 1화를 시청해야 한다고 숙소를 나설 준비를 했다.
프젝맞선 때처럼 드라마에 견하준이 나올 때마다 생생한 리액션 좀 보여 주면서 견하준의 반응을 보려고 했는데, 참 아쉽게 됐다.
‘잠깐만, 술 취해서 정신 잃어도 6회차 견하준이 나올 수 있지 않나?’
견하준에게 필름 끊길 정도로 술 많이 마시고 오라고 견하준의 음주를 격려하려다가 견하준의 술버릇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견하준의 성격상, 그 술버릇을 드라마 촬영진들 앞에서 보이는 그날이 견하준의 연예계 은퇴 날이 될 게 분명했다.
우리 그룹의 소중한 리드보컬이자 내 가이드보컬을 이렇게 허무한 이유로 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견하준이라면 본인 술버릇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든 주량을 칼같이 지킬 것이다.
“만약 술 마시면 회식 자리에서까지는 멀쩡한데 숙소에 와서 뒤늦게 뻗을 정도로 마시고 와라.”
견하준의 사회적 체면까지 생각해 주는 내 섬세하기 그지없는 요구에 견하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가능해……?”
“글쎄다? 이참에 한 번 도전해 보는 건? 주량을 아슬아슬하게 맞추면 될지도 모르겠는데. 준아, 너 네 주량 알지? 한 번 해 봐.”
견하준이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견하준이 강의했던 명절 생존 미소였다. 내 말을 헛소리로 규정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는 뜻이군.
견하준이 나가자마자, 견하준이 숙소에 들어왔을 때 술기운이 확 올라올 수 있도록 보일러를 아주 뜨끈뜨끈하게 온도를 풀로 올렸다.
보일러가 숙소를 뜨끈하게 지지자, 서예현이 연신 본인 옷의 가슴팍을 펄럭이며 내게 타박을 던졌다.
“이제 겨울 가고 3월 다 되어 가는데 너는 무슨 보일러를 한겨울 찜질방급으로 틀어 놓고 그러냐? 반 팔 입고 온도 올리지 말고 그냥 숙소에서 옷을 따뜻하게 입고 있어.”
“아, 꽃샘추위, 꽃샘추위.”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댔다.
<시간 너머의 봄> 1화는 남보다 못한 냉랭한 가족을 버티지 못한 딸이 부모님이 젊을 때의 과거로 타임리프하여, 익숙한 외갓집 앞에서 교복을 입은 외삼촌과 나란히 걸어오는 고교 야구 유니폼 차림의 아빠를 발견하며 끝났다.
1화에는 견하준이 아예 안 나왔다.
그냥 얼마나 이 가족이 콩가루 가족인지, 부모의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그 때문에 딸이 얼마나 상처받고 부모를 지긋지긋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중점으로 보여 주었다.
체감상 “하준이 언제 나와?”만 우리끼리 수십 번 말하다가 끝난 것 같았다.
-뭐임? 하준이 왜 안 나옴? 하준이 등장만 기다리면서 꾸역꾸역 봤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걍 하준이 나올 때 불러달라고 할걸
-내일 엔딩 장면은 하준이가 장식하면서 등장할 거라고 믿을게
-ㄹㅇ 저럴 거면 결혼은 왜 하고 애는 왜 낳음;;; 이게 다 하준이랑 결혼 안 해서 생긴 비극 아녀?
-교복하준이를 우리한테도 보여달라! 보여달라!
-하준이 성인버전?도 안 나왔지?
-한유석 와꾸에도 안 밀리는 하준이 보고 싶다고 얼굴로만 견제 가능한 섭남 빨리 등장시키라고
견하준이 나온다고 드라마를 챙겨 보는 데이드림도 우리랑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지금 부모 결혼 막으러 과거로 간 거야? 그런데 부모가 결혼 안 하면 자기도 안 태어나는 거 아니야?”
“냅둬, 태어나기 싫은가 보지.”
“그런데 진짜 엄마랑 아빠가 맨날 싸우고 집안 분위기 냉랭하고 그러면 대체 왜 결혼했을까 싶어서 저런 선택을 할 만도 하겠네요.”
“그렇게 콩가루 가족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자식한테는 잘 대해 주려고 하잖아요.”
오직 류재희만 이 드라마에 공감을 못 하고 있었다.
류재희의 그 말에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당사자성 발언에 우리가 말을 얹을 수가 있겠냐고.
내가 봤을 때, 드라마 속 저 집이 콩가루가 된 데에는 아버지 잘못이 컸다.
저렇게 말을 하나하나 받아치니까 싸움이 나지.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무조건 져 주고 살아야지 집안이 화목한 법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한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견하준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은 안색으로 멀쩡하게 숙소로 걸어 들어왔다.
“숙소 왜 이렇게 더워? 별로 춥지도 않은데 보일러 온도를 왜 이렇게 높여 놨어?”
코트를 벗으며 견하준이 붉어지지도 않은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숙소에 오자마자 술기운을 팍 오르게 만들어 기절 잠을 재우리란 내 시도는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 소속사 회식 자리에서 대표님이 건넨 술을 자연스럽게 내게 떠넘기거나 놀라운 솜씨로 회피하는 걸 직접 봤던 터라, 견하준이 이번 회식에서 억지로 술을 마시고 취해 올 거라는 전개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모여 있는 우리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아쉬움을 눈치챘는지 견하준이 웃으며 물었다.
“드라마 봤어? 1화에 나 안 나온다고 말해 주는 걸 깜빡했네.”
“형형, 그러면 내일은 나와요?”
“으음, 아마 내일 등장할걸?”
다음 날은 개인 스케줄이 있는 서예현을 제외한 넷이 드라마 본방사수를 했다.
“옆에서 내용 하나하나 꼬투리 잡으면서 열변 토하는 예현이 형이 없어서 그런가, 허전하네요.”
“그러게. 우리는 드라마가 재밌었던 게 아니라 서예현이 태클 거는 걸 듣는 게 더 재밌었던 건가?”
서예현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드라마에 재미와 흥미를 더해 주는 서예현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며 드라마를 감상했다.
[“안녕. 진성이 동생 맞지?”]
이번 화에 나온다던 견하준은 등장과 동시에 엔딩 장면을 장식했다.
여주인공의 오빠가 같이 공부한답시고 견하준을 데려와서, 여주인공의 집에서 여주인공과 마주한 상황이었다.
단정하게 입은 교복, 차분히 내려앉은 짙은 흑발과 그에 대조되는 흰 피부,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 비치는 화사하고 다정한 미소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드라마 엔딩 OST가 흘러나왔다.
견하준의 목소리로 말이다. 누가 작곡했는지 몰라도 음색 참 잘 살렸네.
이번에도 OST 녹음을 맡게 된 견하준은 내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바로 내 데모곡을 지목했다. 류재희에게 가이드녹음을 시키면 들킬까 봐 연습생 한 명 데려와서 가이드녹음을 시켰는데도.
덕분에 곡 결과물이 내 예상보다도 더 잘 뽑혀 우리 OST는 본래 엔딩곡으로 내정되어 있던 곡을 제치고 엔딩곡으로 선정되었다.
-첫사랑 ㅇㅈ합니다
-우리 오빠 이름 왜 진성이 아니냐 ㅅㅂ
-왜하준이가서브죠?왜하준이가서브죠?왜하준이가서브죠?왜하준이가서브죠?
-견하준 유죄
-원래 이런 뉴페이스인 하준이 캐릭터가 메인남주 삘이고 동네오빠, 스포츠남은 서브인 게 유구한 전통이거늘….
-이런 데에서 클리셰 전복하지 말라고요ㅠㅠㅠㅠㅠ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 클리셰는 이뤘자나…
-기억 조작 미쳤다 우리 집 돼지가 하준이를 우리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던 거 같아 하준이가 나한테 저렇게 다정하게 인사해 줬던 거 같아
-연출 미쳤다
-OST ㅈㄴ좋은데?
-OST 하준이 목소리라서 검색해 보니까 역시나 작사작곡 윤이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치 퀘스트를 견하준 등장 드라마 반응으로 돌리며, 견하준의 옆에서 하나하나 읊어 주었다.
견하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귀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견하준은 미친 듯이 울려대는 휴대폰을 핑계로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래도 어머니 전화인 듯싶었다.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서예현은 우리를 붙들고 뒤늦은 드라마 감상평을 쏟아냈다.
“얘들아, 나 촬영 쉬는 시간에 본방사수 했어! 그런데 이게 말이 돼? 친척 어른들 이름 외우고 있다고 그렇게 쉽게 친척이라고 믿는 게 말이 되는 거야? 딸이 아무리 엄마랑 닮았다는 설정이라고 해도? 과거의 외갓집에 머무는 서사가 너무 빈약한 거 아니냐고.”
“그거 나중에, 후반부쯤에 이유 풀려, 형.”
“아, 그래?”
아는 내용을 들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걸 보니, 역시 드라마의 조미료는 서예현의 태클이었나 보다.
* * *
오늘도 성실하게 작업실로 출근했다.
전에 견하준이 언급했다시피, 내가 꼭 해 보고 싶은 실험적인 콘셉트가 있었다.
회귀 전에도 구상만 하고 실제로 구현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자본도 실력도 모두 있기에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걸 이번 정규 앨범에 구현해 보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작업과 시행착오를 계속 거쳐 가는 중이었다.
“쓰읍… 이게 아닌데. 이게 느낌이 많이 달라야 하는데 너무 겹치잖아, 지금.”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코드를 수정하던 중, 차연호에게서 드디어 기다리던 답장이 도착했다.
[차연호- 소속사에서는 다른 래퍼 붙여 주려고 했는데]
[차연호- 정준이가 직접 부탁했다는데?]
[차연호- 그래서 정준이한테 물어보니까 D.I랑 한번 작업해 보고 싶었대] 오후 2:32
[차연호- DTB 3 인상 깊게 봐서] 오후 2:33
거짓말탐지기가 잠깐 생각나긴 했으나, 본인 친구의 안위가 달린 문제에서까지 설마 이빨을 깔까 싶어서 일단 70%만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러면 이제 케이제이에게 ‘진짜’ 이유를 물어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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