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698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697화
어쩌겠냐, 정아야. 이 오빠의 후광에 기대지 말고 공정하게 다른 데이드림들처럼 최애를 팬싸로 만나라는 계시 아니겠냐.
네가 없는 날에 서예현을 데려온 나를 원망하지 말고, 서예현을 데려온 날에 해외 여행을 간 너 스스로를 원망해라.
서예현이 등장한 이후로 어쩐지 기가 확 죽은 것 같은 윤현호를 보며 새삼 서예현의 쓸모를 마음속 깊이 느꼈다.
꿋꿋이 저 잘났다고 나를 깔볼 틈만 노리는 저 자식을 외모만으로 기죽게 만들다니.
하긴, 서예현은 나조차도 비주얼멤의 꿈을 한방에 접게 만든 전적이 있었다. 서예현이 윤씨 집안 카운터였다니.
사촌들이 먼저 세배하고, 나는 기다렸다가 류재희랑 서예현과 함께 세배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세 명이 온 터라 구성만 바뀌었을 뿐, 사람 수는 바뀌지 않았으니 딱히 할아버지 지갑을 털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다.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딱 봐도 평소보다 두툼해 보이는 봉투를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공손히 건네받았다.
“최종 우승한 건 잘했다. 정치질보다 머리를 더 썼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보면서 아주 정계 진출을 시키고 싶더라.”
농처럼 던졌지만 숨길 수 없는 할아버지의 한 가닥 진심에, 서예현이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나를 힐긋거렸다.
다음으로 류재희에게 50만 원이 들었을 두툼한 봉투를 내밀며 할아버지가 류재희와 서예현에게 칭찬을 건넸다.
“똑똑하긴 너희 둘이 더 똑똑해 보이더구먼.”
감상평을 모든 출연진들한테 직접 전달하는 걸 보니 꽤 재미있게 보신 모양이었다. 예선전에서는 서예현과 류재희가 머리로 더 활약했던 건 사실이었기에 딱히 말을 얹진 않았다.
다음으로 할아버지의 시선이 세미 뉴페이스인 서예현에게 닿자마자 서예현이 인서울 대학 사학과 중퇴라는 사실을 어필했다.
“사이버대학교 아니고?”
사이버대학을 당당하게 대학이라 말하던 김도빈의 말이 아직까지 충격으로 남아 있었던 건지 할아버지는 크로스체크까지 꼼꼼하게 해댔다.
“네, 진짜 사바세계의 대학이요. 그러니까 타협해서 40만 원이면 충분할 듯요?”
딱히 서예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야지 내가 내기에서 이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쓰읍…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지 않았던가?”
할아버지는 서예현을 5년 전에 봤던 걸 기억함으로써 기억력도 아직 정정하다는 걸 증명했다. 아니면 서예현 얼굴이 기억에 그만큼 잘 남을 정도거나.
“네, 할아버님 팔순잔치에 재희랑 같이 갔었습니다.”
팔순잔치 집안디스랩 공연 현장에 있던 놈이었단 걸 알게 된 할아버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마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서예현도 그 짓거리를 말리지 않은 끼리끼리가 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번처럼 내가 한놈 더 데려올 거라고 예상하고 계셨기라도 한 건지, 지갑을 꺼내 5만원 권 지폐 여덟 장을 세던 할아버지가 서예현을 보며 물었다.
“네가 이든이보다 한 살 형이랬지?”
“예.”
반듯한 대답에 할아버지가 지폐 두 장을 더 추가하여 서예현에게 건네며 말했다.
“동생들 잘 이끌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거라. 저 녀석한테 휘말리지 말고.”
이럴 수가! 김도빈이 이겼다니!
내가 서예현이 대학 갔다는 말만 안 했어도 내가 이 내기에서 이겼을 거라니!
그리고 내가 리더인데 이끌긴 누가 이끌어!
말로만 세뱃돈 50만 원을 들었지 직접 받으니 영 부담되는지, 서예현은 몇 번을 괜찮다고 사양하다가 어른이 주는 거 계속 거절해도 예의가 아니라는 할아버지의 꼰대 발언을 듣고 나서야 겨우 세뱃돈을 받아 들었다.
셋이 와서 할아버지에게 총 150만 원을 뜯은 셈이었다. 회귀 전에 연 끊으면서 받지 못한 세뱃돈 몫이라고 생각하니 딱히 죄송하진 않았다.
“잠깐만,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TV에서 봤겠지. 광고 많이 나오잖아.”
“아, 맞다! 동기 폰 배경 화면!”
동기 폰 배경 화면까지 기억하는 사촌 누나 덕분에 서예현이 한바탕 사인 머신이 되는 사이, 어느새 정원 구경을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내가 불렀음에도 여전히 할아버지의 시선은 정원을 향해 있었다. 설마 진짜 세뱃돈으로 500만 원 주라고 할까 봐 먹금하고 계시는 건가.
“제가 사고 하나 거하게 치면, 도와주실 수 있어요?”
“죄짓는 거면 못 도와준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할아버지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런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아는 친조부라면, 아무리 가족이라 한들 범죄만큼은 결코 눈감아 주지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대형 기획사 때리는 건요?”
그제야 할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내 눈을 보고 단순히 당신 관심을 끌려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는지 할아버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부러지느니 꺾일 테냐, 꺾이려거든 부러질 테냐.”
내가 선택했던 건 항상 후자였다.
멍청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태생이 이렇게 태어난 것을.
그리고 할아버지 역시 질문의 답을 내 입으로 듣지 않아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결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런 나를 잘 알고 있는 할아버지가 그것을 염려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돌려 드릴 답은 할아버지의 생각과는 다를 터였다.
“둘 다 아니요. 부러지거나 꺾이지 않게 만반의 준비 다 하고 쳐야죠.”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몇 번을 꺾이느니 부러져 가며 얻은 교훈이자 마침내 손에 넣은 절호의 찬스였다.
“이란격석,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위 안에서부터 균열이 가 있으면, 계란도 충분히 바위를 깰 수 있겠죠.”
내 당당한 대꾸에 지그시 눈을 감은 할아버지에게서 내 장례식 기억에서 봤던 그 모습이 겹쳤다.
그때는 내 성격에 아마 아버지는 물론 절연한 할아버지께 도움을 청할 생각도 안 했을 텐데.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달라진 것도 이렇게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건가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할아버지가 드디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마. 기껏 성공한 손주 녀석 부러지는 걸 어찌 보누. 내가 하지 말라고 한들, 네가 내 말 들어먹을 위인도 아니고.”
신월 이제 뒤졌다. 목 닦고 기다려라.
“절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증거 모으고 있다는 티 내지 말고, 함부로 사람 믿지 마라. 일개 개인이 기업 상대로 이기는 게 어디 쉽간? 판례 한 번 훑어봐라. 그런 사례가 얼마나 있는지. 이 할애비 인맥 믿고 저질러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선이 있는 법이다.”
할아버지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충고라서 귀에 잘 새겨들었는데 점점 갈수록 예의와 이미지와 자격증과 미래 대비 어쩌고 하는 쓸데없는 잔소리였다.
견하준이 선보인 명절 생존 미소 강의를 떠올리며 견하준이 하라고 했던 대로 눈꼬리를 내리고 입꼬리를 은은하게 올린 다음 1분에 한 번씩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내가 견하준에게 이 강의를 하라고 귀띔해 준 이유는 간단했다.
이게 조회수가 잘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견하준이 명절에 웃으면서 고개 끄덕이고 있으면 잔소리가 어느 순간 끝나 있다고 내게 말했던 게 문득 생각나기도 했고.
그 스킬을 견하준이 실생활에도 써먹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게 그거랑 같은 미소일 거라고 내가 예상이나 했겠냐.
‘오, 먹히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할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졌다.
“듣는 척만 하지 말고!”
안 먹히는군.
좋아, 그러면 플랜 B로 간다.
“아, 생각해 보니까 이걸 말을 안 했네. 제가 또 솔로로 한대음 최우수 랩&힙합 부문 상도 받았거든요. 한대음이 뭐냐면요, 한국대중음악상을 줄여서 한대음인데 이게 우리나라에서 제법 알아주는 권위 있는 상이거든요. 제 솔로앨범이 사실 한대음 올해의 음반이랑 올해의 노래에도 후보에 올랐는데…”
한대음의 연혁과 의미, 내 솔로 앨범이 올해의 앨범에 올랐다는 이야기와 심사평, 그리고 겸사겸사 류재희도 최우수 팝 부문 상을 탔다는 우리 막내 자랑까지 이어 나갔다.
그 얘기에 할아버지의 눈이 우리집 시스템이 지질 정도의 동태눈이 되었다고 하면 너무 패륜적인가?
이제 할아버지도 관심 없는 이야기가 얼마나 지루하고 집중이 어려운 건지 깨달으셨을 거다. 이걸 역지사지로 깨우치게 해주는 나 같은 손자가 어디 있냐.
내가 다시 멤버들한테로 돌아가기 전, 할아버지가 정원의 분재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 툭 던졌다.
“…차라리 꺾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그게 도저히 안 되니까 이렇게 사는 거죠.”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친가에서 식사를 마친 후, 부모님을 두고 우리만 내 본가로 먼저 돌아오는 길.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았다.
“하준이가 알려준 그대로 했는데, 왜지? 왜 한 귀로 흘리고 있단 걸 들킨 거지?”
“준비물이 하준이 얼굴인가 보지.”
“형은 눈꼬리를 내려도 인상이 안 순순해 보여서 그래요. 형이 순순한 인상을 만들려면 거의 울상 짓는 급으로 내려야 해요.”
“에이씨, 때려 쳐.”
인상 나쁜 사람은 잔소리를 흘려듣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듣고 살아야 한다는 소리야, 뭐야.
“아, 맞다. 내가 방금은 너희 조부님 앞이라서 말을 못 했는데, 네가 정계 진출하면 국회 출석 한 번 했다가 국회선진화법 위반으로 바로 기소될 거 같아.”
그 말을 할아버지 앞에서 하지 않은 서예현의 사회성에 RESPECT를 보내 주었다.
[윤정아- 오빠 제발]
[윤정아- 다른건 안바랄게]
[윤정아- 예현오빠 싸인만이라도 남겨줘] 오후 1:32
그리고 윤정아는 기어코 메시지 100통을 달성했다. 여행 갔으면 즐기기나 할 것이지, 이 짜식은 밥 먹고 메시지만 보냈나.
* * *
다음 날.
“포도!”
내 본가에 먼저 도착한 건 김도빈이었다.
이전에 한 번 본 적 있기는 했지만 류재희와 서예현이 사흘을 눌러앉아 있는 바람에 상대적 낯선 사람이 된 김도빈을 포도가 온몸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세상에, 나를 이렇게 반겨 주다니… 카이사르는 나를 본 채 만 채도 안 했는데 너무 감동이야…”
포도와 카이사르를 비교하는 말을 내뱉어 놓고 아차하는 눈치로 김도빈이 서예현을 살폈지만, 여전히 카이사르한테 삐쳐 있는 서예현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포도를 폭풍 칭찬했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 포도는 뺨 때리는 누구랑 달리 뺨도 핥아 주고. 어? 그러고 보니까 강아지는 혀가 안 까끌거리네?”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짐을 내려놓은 김도빈이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거 우리 할머니 반찬인데, 숙소에서 챙겨 먹으라고 싸 주셨어요. 그리고 이건 제가 이든이 형네 집 간다니까 엄마가 챙겨 주신 거.”
“그거 내일 숙소 가져가게 냉장고에 넣어 놔. 그리고 홍삼은… 엄마! 홍삼 어디에다가 놔둬?”
김도빈에게 마구 치대던 포도가 현관으로 달려감과 동시에,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준이 왔니? 집에서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네.”
“네, 아무래도 이제 이든이랑 같은 숙소 사니까 본가 같이 들를 일이 거의 없었네요.”
방에서 나온 엄마가 현관에 두 손 무겁게 서 있는 견하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드디어 레브 다섯 명이 내 본가에 모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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