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693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692화
* * *
“작업실 갔다 온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켜 놓은 텔레비전은 안 보고 무언가를 열심히 휴대폰에 검색 중인 막내의 눈앞에서 손을 휘적이며 말했다.
사람이 가면 배웅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어?
그제야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본 류재희가 물었다.
“하준이 형 드라마 OST 작업하러 가요?”
“쓰읍-.”
견하준이 숙소에 있는데도 이 중대한 기밀을 다 들리게 말하는 류재희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눈치를 주다가 멈칫했다.
나름 견하준한테 비밀로 부친답시고 멤버들한테도 따로 견하준 드라마 OST 제안 왔다고 말을 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류재희가 내가 견하준 드라마 OST를 작업하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OST 작업하러 가는 건 아니긴 한데, 내가 OST 제안 받은 거 어떻게 알았냐?”
설마 류재희가 이제 말하지 않은 것도 알아채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 건가? 내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묻자 류재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형이 SNS에 글 올릴 때 썼잖아요.”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황급히 SNS 앱을 열어 내가 썼던 게시글을 확인했다.
“내가 OST 기대된다고 썼지 내가 언제 OST를 내가 작곡한다고 썼냐? 엉?”
삐딱한 말투로 류재희의 앞에 휴대폰 화면을 흔들어 보이자 게시글을 읽은 류재희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라, 다시 보니까 진짜 그러네. 그냥 읽으면서 당연하게 형이 작곡하고 하준이 형이 부를 OST를 기대한다고 머릿속에서 치환이 됐어요.”
그러고 보니 어제 데이드림들이 인용으로 보낸 반응들도 당연히 내가 OST를 작곡하리라는 걸 전제로 깔고선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티 났나?
그렇다면 견하준도 이미 눈치챘을 확률이 높으므로 기밀 유지 노력을 바로 포기했다.
“드라마 OST 작업도 하긴 하는데, 지금 가는 건 우리 설날 특집 자컨 때문에. 준비물 만들어야 할 거 아니냐.”
“아, 이전 걸로 안 하고 새롭게 하시게요?”
“그것도 있고.”
대충 납득한 류재희한테 다시 인사를 건네고 작업실로 향하려 하자 류재희도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맞다. 형, 같이 가요.”
“우리 막내도 드디어 즐거운 작곡 놀이를 할 마음이 생겼구나!”
요새 김도빈이 좀 적응했는지 하드 모드도 너무 순탄하게 잘 따라와서 슬슬 심심하던 차였는데 뉴비를 키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렜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작곡 스페어를 하나 더 만들 생각에 들떠 있자 류재희가 곧바로 부정했다.
아무튼, 무슨 용건이 있는지 모를 류재희를 달고 작업실에 도착했다.
작업실에 도착하고도 류재희는 한참을 말하기를 주저하며 소파에 앉아만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면 그러냐? 마음의 준비되면 말해라. 나도 들을 마음의 준비 좀 하게.”
그런 류재희를 굳이 재촉하지 않고 해야 할 작업을 하며 류재희가 입을 열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김도빈이나 서예현이 저러면 헛소리일 확률이 대략 80%였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그게 류재희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류재희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는 나름의 믿음이 있달까.
내가 작업 두 개를 마무리해 갈 무렵에야 류재희는 천천히 운을 뗐다.
“그… 하준이 형이 하루 종일 촬영 스케줄 잡힌 날 있었잖아요. 그래서 새벽에 들어온다고 했던 날.”
그때라면 다들 휴가라고 새나라의 어린이에 빙의해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던 땐데. 나도 그날 견하준이 촬영 끝나고 오기 전에 잠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어어, 기억하지. 그런데 그때 왜. 혹시 촬영장에서 갑질당했대?”
뚜둑, 가볍게 손마디를 꺾으며 묻자 류재희가 아주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초당 두 번씩 돌아가는 걸 보니 내가 당장 촬영장 달려가서 깽판이라도 칠까 봐 걱정됐던 모양이다.
“그때 제가 새벽에 목말라서 깼는데, 하준이 형이 옷도 안 갈아입고 소파에서 자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잠귀 밝은 친구가 옷도 안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서 잠들 정도였다니, 정말로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이게 다 밥을 안 먹고 서예현식으로 살을 빼서 그래.
체형 유지한다고 드라마 촬영 동안은 좋아하는 디저트 사다 줘도 별로 몇 입 먹지도 못하고 저번처럼 막내 라인한테 죄다 몰아줄 게 분명하니, 촬영 끝나면 디저트나 양껏 사다 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고민하다가 말을 꺼낼 만한 일인가? 내가 의문을 느끼기가 무섭게 류재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깨우러 갔는데…”
여기에서부터 류재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내 얼굴도 따라서 심각해졌다.
“하준이 형이 눈 떠서 저를 빤히 보다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러는 거예요. 이든이랑 너랑 솔로곡은 냈냐고. 제 가족 문제는 잘 해결됐냐고.”
그걸 말하는 류재희의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준이 형이 이걸 모를 리가 없잖아요. 기억이 데뷔 초로 롤백하지 않은 이상, 저희가 제 가족 문제도 다 같이 해결했고 저랑 형 솔로 앨범은 당장 작년인데.”
아니, 나는 알고 있었다.
류재희가 가족 문제로 마음고생하고, 보컬로 인정받지 못하는 걸 씁쓸해하고, 내가 내 음악을 포기하고 미련 떨던 그 시간을.
그리고 내 모든 기억을 떠맡으며 그 모든 시간을 기억하고 있을 이를.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형들 아침 운동 갔을 때 하준이 형한테 슬쩍 물어봤거든요?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런데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소파에서 잠든 것도, 제가 소파에서 잠든 하준이 형을 깨운 것도 기억을 못 하는 거예요.”
류재희의 그 말에 오히려 더 확실해졌다. 류재희가 마주한 건 6회차의 견하준이었다.
견하준의 피로도가 깊었기에 평소처럼 작은 소음에도 깨지 못하고 의식을 찾지 못해 류재희가 견하준의 꿈에 갇혀 있는 6회차의 견하준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거 증상을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여기에서부터 류재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남의 기억 떠안은 회귀 전 자아가 인터넷에 나오나? 논문보다는 김도빈이 즐겨 보는 것들에만 나올 거 같은데.
이제는 눈시울까지 붉어진 류재희가 겨우 말을 털어놓았다.
“영츠하이머라고 기억력 감퇴 증상인데 이게 20대 치매, 젊은 치매라고… 하준이 형 어떡해요? 병원 데리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
나는 그날 류재희에게 말을 걸었던 게 6회차 견하준임을 바로 직감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그냥 치매 증상이었다.
하긴, 시간이 돌아갔다는 걸 김도빈 아니면 누가 상상이나 하겠냐.
왜 류재희가 고민하다가 겨우 말을 꺼낸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본인 딴에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던 거다. 그룹 멤버 형이 이 젊은 나이에 치매 증상을 보였으니.
귀신 들렸다고 의심받는 게 나을까, 아니면 치매라고 의심받는 게 나을까.
우리 멤버 놈들의 의심은 정말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아니, 무슨 의심을 해도 이런 의심들을.
견하준을 향한 걱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려 대는 류재희의 등을 건성으로 다독여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6회차 견하준을 만나려면 지금 견하준을 과로시켜야 한다는 뜻인가?
과로를 어떻게 시켜? 가이드녹음 하루 종일 시키기라도 해? 그러다가 성대결절 오면 어쩌려고? 하루 종일 즐거운 작곡 놀이 헬 모드? 견하준이 내 작업실에 ptsd 생겨서 내 작업실에 오는 걸 기피하면 나만 손해인데? 하루 종일 같이 운동을 한다거나? 고강도 유산소는 근손실의 지름길인데?
그리고 이건 견하준을 괴롭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 아닌가. 나는 자신 없다.
가슴 아프긴 하지만 빡센 촬영 스케줄 한 번 더 잡히길 빌 수밖에.
“일단 하준이한테는 말하자 마. 안 그래도 지금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쁜데 괜히 신경 쓸라.”
몰려오는 답답함에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류재희한테 단단하게 경고해 놓았다.
견하준이 본인 상태를 몰라야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편하게 숙소에서 뻗을 거 아닌가. 그래야지 내가 6회차 견하준이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심란한 마음을 잊기 위해 작업에 몰두했다. 류재희도 마찬가지로 심란한지 내 옆으로 와서 작업이 방해되지 않을 선에서 내게 자꾸만 말을 걸어댔다.
문득, 류재희한테는 나름 다정했던 6회차의 견하준이 내게는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졌다.
원망할지, 아니면 내게도 다정하게 물어봐 줄지.
흠, 지금 류재희가 만난 루트 찬스가 두 번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건가?
* * *
자컨 촬영까지 D-3.
처음부터 주제가 정해진 나와 달리 멤버들은 본인들의 콘텐츠 주제를 쥐어 짜내느라 바빴다.
그래도 한결 쉽게 주제를 정한 건 서예현과 김도빈이었고, 마지막까지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건 견하준이었다.
주제를 정하는 데에 고민을 제법 오래 했던 류재희의 경우와 견하준의 경우는 조금 달랐는데, 류재희는 본인이 생각한 여러 아이디어 중 어떤 게 반응이 제일 좋을지 고르느라 고민을 했던 것이라면, 견하준은 생각나는 게 딱히 없어서 대체 뭘 해야 할까 고민을 오래 했다.
“재희도 이제 정했다던데, 나만 못 정했네.”
네 명 모두를 돌아가면서 붙들고 설문 조사를 받던 류재희는 얼마 전에 주제 하나를 정했다. 어이없게도 제일 표를 적게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류재희가 탈출한 덕분에 혼자가 된 견하준의 마음만 제일 급해졌다.
“아무래도 명절 콘텐츠니까 명절 관련으로 해야 하겠지…? 그런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그냥 나한테 명절은 친척들 다 모이는 날이었는데, 대체 뭘 해야…”
견하준이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문질렀다.
“재희에게 아이디어 하나 양도해 달라고 하는 건?”
“그래도 남의 아이디어보다 내가 자신 있는 걸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있었다. 견하준이 제일 잘하는 거.
“그러면 내가 아이디어 제공해도 되냐?”
“일단 들어는 볼게.”
언제든지 한 발 뺄 수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들으면 생각이 바뀔 거다.
내가 말하는 아이디어를 들을수록 견하준의 표정이 점점 솔깃하게 바뀌었다.
솔직히 조회 수 제일 폭발 MVP 각이다,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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