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688
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687화
* * *
드디어 정체를 알아낸 USB를 손바닥 안에서 가볍게 굴렸다.
이게 쓸모없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긴 했지만, 이제는 이걸 내게 넘겨 준 리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영 찝찝했다.
‘일단 이게 케이제이 회유에 한몫하긴 했군.’
따지자면 차연호보다는 케이제이가 회유하기 더 까다로운 상대이긴 했다.
차연호보다 지능도 높고 눈치도 월등히 빠를 뿐더러, 회귀 전 기억이 없어 본인 입장으로는 내가 신월 엔터에 이유 모를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보일 테니까.
제일 확실하고 대중들한테도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건 아무래도 내부 고발자 아니겠는가.
그래서 케이제이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 빌어먹을 신월 엔터 착취 시스템의 당사자이기도 하고, 차연호는 케이제이의 생존만 보장된다면 손을 털고도 남을 놈이었기에.
라이징 견제하고 남의 히트곡까지 뜯어 오던 놈이 추락을 견디겠어?
그럼 이제 나한테 남은 건, 3, 4, 5, 6회차에 실패한 이유를 찾는 것이었다. 시간이야 차연호가 돌렸다고 해도, 나 역시 그 회차에서 손 놓고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까.
김도빈이랑 함께 회귀했던 회차야 왜 실패했는지 굳이 기억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지만, 류재희와 서예현이 함께 회귀했던 회차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실패한 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래도 그 둘은 제법 도움이 됐을 거 같은데, 왜?
제일 가능성이 높은 가설은 차연호가 나를 케이제이의 사망 원인으로 확신하고 적대하느라 내 복수를 방해했다는 건데… 류재희가 겨우 차연호 따리의 방해에 졌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나는 우리 막내를 믿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내 모든 기억을 떠맡고 있다는 6회차 견하준과 대화만 한다면, 그러면 기억을 모두 찾을 수 있을까.
너무 꽉 쥐고 있었던 건지, USB 모양으로 손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리번한테 이 곡 어디에서 구한 거냐고 물어보면 말해 주려나?’
나한테 이걸 왜 준 건지 물어봐도 그 미친 약쟁이가 순순히 말해 줄는지 모르겠다.
일단 리번과 연락하는 일은 지원이 형한테 외주를 줄지, 아니면 내가 직접 할지 고민 중이었다.
리번이랑 개싸움까지 했던 지원이 형한테 외주 맡기는 건 아무래도 미안했다. 그리고 USB 속 곡은 아는 이가 적을수록 안전했다. 지원이 형은 ‘선 안’의 인물이라 큰 상관이 없긴 하지만.
직접 연락하는 게 제일 편하긴 하다만, 상대가 빨간 줄까지 그인 약쟁이라 문제지.
‘하지만 그때 만남을 생각하면 확실히 지원이 형이 옆에 있어야지 내가 휘둘릴 일이 없는데 말이지….’
“형!”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또 뭘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세요. 사람 불안해지게.”
“너는 내가 진지한 생각만 하면 불안해지냐?”
가깝게 얼굴을 들이댄 류재희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먹이며 투덜거렸다. 힘 다 빼고 최대한 가볍게 쳤건만, 류재희는 이마를 감싸 쥐며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그것도 잠시, 이마를 감싸 쥔 손을 쓱 내린 류재희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내일 일이나 약속 없죠? 일 없으시면 내일 청주 갈 때 같이 가요.”
“나는 왜? 예현이 형이랑 가는 거 아니었어? 예현이 형이 집 볼 때 더 꼼꼼하게 볼 거 같다며.”
류재희는 서예현과 나 중에서 서예현을 택했다. 서예현이 좀 더 집 상태와 위치, 월세 등을 꼼꼼히 따져 보고 결정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나는 귀찮다고 아무 곳에서나 살 거 같다는 이미지라나, 뭐라나.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건 내 집일 때 한정이지, 남의 집은 꼼꼼히 봐 줄 용의가 충분하단 말이다.
그렇게 두 류씨 형제의 집 구하기 보호자에서 탈락하나 싶었지만, 왜 또 데려간다는 건지 모르겠다.
눈을 찡긋한 류재희가 내 딱밤이 닿지 않을 곳까지 후다닥 뒷걸음질로 멀어지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호구 잡히지 않을 만한 인상 한 명 세워 놔야겠더라고요. 형이 있어야지 제대로 된 매물을 처음부터 잘 보여 줄 것 같아요. 이건 예현이 형도 동의한 바예요.”
나를 환불 원정대용으로 써먹다니.
“그래도 동생이 기숙사 들어간다고 고집은 안 부렸나 보다?”
그 말에 류재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학금이랑 등록금을 자기가 모아 놓은 돈으로 내느라 기숙사비가 부족했대요. 그래서 근처 원룸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저야 오히려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아니, 대학 합격했는데 집에서 그 정도 보탬도 안 해 줬대?”
“엄마가 재선이 입학금도 안 내줬대요. 돈 없다고.”
“설마 너희 둘째 대학 등록금 내느라 그런 거 아니야? 그때도 그렇고, 둘째만 유독 챙기나? 걔 진짜 밉상이던데, 부모님한테는 잘 하냐?”
“그럴 리가요. 그리고 류재경 대학 안 갔대요. 재수한다는데요. 재선이 말로는 류재경 재수 학원비도 안 대 준다고 하던데, 딱히 류재경만 챙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쯤 되면 동생들 가지고 류재희한테 시위하는 거 아니냐.
“돈을 대체 어디에 쓰시는 건지. 뭐, 이제 제가 알 바는 아니지만요.”
더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류재희가 진저리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짧게 저었다.
“일단, 알았다. 내일 딱히 일도 없으니까 따라가지, 뭐.”
환불 원정대 인상파 역할 외주를 받았으니 나도 류재희 두뇌 외주나 줘야겠다.
“막내야, 내가 잘 속을 상이냐?”
“네.”
류재희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무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멋쩍게 뒷머리를 쓸어 올렸다.
“솔직히 형은 인상 때문에 속이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렇지, 낙하산 건만 봐도, 음….”
그건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내 뒤통수 갈길 거 같은 사람은 웬만하면 혼자 만나면 안 되겠지?”
“네.”
류재희의 대답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편해졌다. 아무래도 연락은 지원이 형한테 외주 줘야겠다.
[형] 오후 5:32
[USB 곡 정체 알아냈어요]
[그런데 이제 왜 이걸 저한테 준 건지, 그리고 어떤 경로로 손에 넣은 건지를 알아내야 하거든요] 오후 5:34
[만약 리번이랑 연락하시기 힘들면 제가 연락할 테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오후 5:35
언제까지나 내 일이고 내 복수였으니 지원 형한테 절연한 친구와 연락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어 나가야 할 의무는 없었다.
[지원이형- 뭔데? 무슨 곡이었는데?] 오후 5:37
지원이 형도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9년 전에 자살한 신월 연습생 데모곡이요] 오후 5:38
[록 선배님 솔로곡으로 발매됐다가 음주운전 때문에 묻혔다는데요] 오후 5:39
[지원이형- 워후 미친놈들이네]
[지원이형- 그런데 그걸 왜 그 새끼가 가지고 있어?] 오후 5:41
[저도 그게 궁금해서요] 오후 5:42
[지원이형- 연락해 보긴 할 텐데 그 새끼가 씹을 수도 있으니까 크게 기대하진 말고] 오후 5:44
역시 외주가 답이다.
* * *
“아, 형! 좀 빨리 가자고!”
“잠시만 있어 봐! 체크리스트 좀 챙기고!”
아침부터 숙소가 소란스러웠다. 서예현이 빽빽한 체크리스트가 적힌 종이를 들고 현관으로 달려왔다.
“뭐야, 이건…?”
“이거 다 체크하면서 집을 보러 다녀야지. 그러면 그냥 몸만 딸랑 가서 보고 비교하려고 했냐?”
서예현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내 눈앞에 체크리스트 종이를 흔들어 댔다. 왜 류재희가 내가 아닌 서예현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류재희 막내동생을 만나자마자 봉투를 내밀었다.
“대학 합격 축하한다. 세뱃돈 겸 용돈이니까 잘 쓰고.”
류재희 동생은 90도로 꾸벅 인사하고 아주 공손히 봉투를 받아 곧바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전에 자기 둘째 형이 앞에서 용돈 봉투 열어서 액수 확인해 봤다가 나한테 닦였던 걸 잘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제 동생 대신 류재희가 내게 귀띔으로 물어보았다.
“얼마 줬어요?”
“50.”
“너무 많이 준 거 아니에요?”
“우리집은 원래 대학 가면 50씩 주잖어. 어차피 이번 설에 가서 우승빨로 50 뜯어가니까 괜찮아. 내가 제8회 우승자 아니냐.”
“으아아! 그만 좀 해라, 진짜! 나 진짜 노이로제 걸리게 생겼어!”
서예현이 옆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잠시 후 진정한 서예현이 체크리스트와 펜을 류재희 막내동생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에서 네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동그라미 치고 제일 포기해도 괜찮은 거에 작게 X자 쳐줘. 알았지?”
철저한 서예현의 준비성은 집을 보러 다닐 때 비로소 빛을 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다른 건 다 좋긴 한데, 북향인 게 좀 그러네요. 곰팡이랑 햇빛이랑 생각하면 남향이 낫지 않나요?”
“요즘은 북향도 괜찮아요, 시원하고. 습기는 제습기 틀면 되고.”
“남향이 좋죠.”
“지금이 추워서 그러지, 여름에 봐 봐. 후회 안 한다니까?”
“남향.”
“집이 너무 밝아도 사람이 힘들어.”
“남향.”
광장에서 중립국을 외치는 것처럼 서예현은 남향만 외쳐 댔다.
그런 서예현의 옆에서 큼큼, 헛기침을 하며 중개인을 쓱 돌아보자 그는 결국 우리한테 북향집을 영업하는 걸 포기하고 다음 매물로 넘어갔다.
체크리스트를 모두 만족하는 집을 어떻게든 찾아내겠다는 듯 타협이라곤 없는 서예현과, 그런 서예현이 결코 타협하지 않게 열심히 서포트해 주는 나.
우리 둘의 조합으로 열심히 발품 판 덕분에 류재희네 막내동생은 대학가 근처에 제법 괜찮은 빌라를 구할 수 있었다.
“고마워, 큰형. 감사합니다, 형들. 바쁘실 텐데….”
“우리 안 바빠. 휴가거든.”
우리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하는 류재희 막내동생에게 서예현도 뒤늦게 용돈 봉투를 내밀었다. 갑자기 급하게 ATM기 찾더니, 저거 뽑아 오느라 그랬나 보다.
“이제 안심되지, 형? 나도 이제 다 컸으니까 형이 책임질 게 없어. 그냥 놔도 돼. 형도 지긋지긋했을 텐데….”
“…그래. 그래도 형한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연락하고. 형이 월세 보내는 거 잘 받고. 알았지?”
류재희 막냇동생이 후련하게 웃으며 류재희를 다독이곤 류재희의 본가를 향해 멀어졌다.
“오우, 우리 막내 완전 형이다, 형.”
“너도 막내 반만 닮아 봐라.”
“에엥? 나는 이미 충분히 어른스러운 형인데?”
“충분히 어른스러운 형 다 얼어 뒤졌나.”
“형도 막내 반만 닮아 보시지? 어? 나한테도 용돈 내놔! 나도 형 동생인데 왜 용돈 안 줘!”
“돈도 잘 버는 놈이 나한테 돈 뜯어 가려 하네!”
류재희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른 걸 우리는 모른 척해 줬다. 사실 서예현과 반진심으로 싸우느라 신경을 덜 쓴 것도 있다.
지잉-
‘음, 뭐지?’
숙소로 돌아와 휴대폰을 확인하자 꽤 의외의 사람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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