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655화

“점수가 제일 낮은 순부터 발표하겠습니다.”

다들 그래도 꼴등은 피하고 싶은지, 본인의 이름이 첫 순서로 불릴까 봐 초조한 얼굴로 순위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불린 이름은 모두의 예상을 빗겨 나간 이름이었다.

“5위, 하준 씨.”

모두의 꼴등 예상자였던 김도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견하준은 반대로 담담히 본인의 순위를 받아들였다.

“활약 1점에 금지어 ‘여기’ 9번 언급, 30초 이상 침묵 세 번 감점으로 총 마이너스 11점입니다.”

견하준이 제법 주도적으로 이것저것 찾기도 했고 말도 평소보다 많이 했기에 활약 점수가 더 높을 줄 알았더니만 겨우 1점이라니. 내 활약 점수는 대체 몇 점일까 싶었다.

“다음은 공동 3위입니다. 도빈 씨, 활약 1점에 금지어 ‘힌트’ 10번 언급으로 총 마이너스 9점입니다.”

다음으로 이름이 불린 이는 김도빈이었다. 공동 3위라 4위랑 다름없긴 하지만, 그래도 모두의 예상보다 무려 두 순위나 오른 점수에 다들 훈훈하게 칭찬의 박수를 보내 주었다.

견하준이 30초 넘게 침묵하지만 않았어도 마이너스 8점으로 김도빈보다는 점수가 높았을 텐데. 안타깝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 예선전에서 김도빈의 운발은 얼결에 노크 박자 맞추기로 몰빵된 모양이다.

김도빈과 함께 영광의 공동 3위에 등극한 사람은 놀랍게도 내가 아니었다.

“공동 3위, 유제 씨. 활약 3점에 금지어 ‘머리’ 12번 언급으로 총 마이너스 9점입니다.”

“네? 마이너스 9점이요? 제가요? 혹시 이든이 형 점수랑 제 점수를 헷갈리셨다거나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류재희가 따발총처럼 본인 점수에 이의를 제기했다. 막내한테서 래퍼의 자질을 보았다.

왜 나를 끌고 오는 건가 싶었는데, 남은 게 류재희와 투톱으로 활약을 선보였던 서예현밖에 없어서 바로 납득했다.

“유제 씨 점수 맞습니다.”

류재희는 본인의 점수가 김도빈과 같다는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입을 떡 벌렸다.

“이럴 수가… 형들이 금지어 정하기 귀찮다고 재탕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니…”

“예현이 형 금지어 정하면서 한 번 써먹었는데 굳이?”

“저는 형들이 머리를 굴린답시고 한 번 더 꼬아 놨을 줄 알았죠. 그래서 ‘봐 봐요’도 필사적으로 피했던 건데.”

본선 진출이 물 건너간 류재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김도빈이 그런 류재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해 줬지만, 딱히 류재희한테 위로가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나랑 서예현뿐이었다.

서예현은 본인의 본선 진출을 확신하기라도 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힐긋 돌아보았다. 본인이 얼마나 금지어를 많이 썼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금지어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나도 모르긴 하지.

“2위, 예현 씨. 활약 3점에 금지어 ‘진짜’ 10번 언급으로 총 마이너스 7점입니다.”

PD님 입에서 나온 본인 이름에 서예현이 김샌 숨을 내쉬었다.

“금지어가 ‘금지어’가 아니라 ‘진짜’였구나.”

그걸 이제야 안 서예현이 한탄하다가 멈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그렇다면 1등이…”

“이든 씨, 활약 2점에 금지어 ‘뭔데’ 0번 언급으로 총 2점입니다. 본선 진출 축하드립니다!”

“오?”

이럴 수가. 내가 유일한 플러스 점수 소유자라니.

내가 레브 최강 브레인이라니!

이건 꼭 친할아버지에게 방영 날짜와 시간, 채널을 보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손자가 무려 두뇌로 1등을 했는데, 이렇게라도 효도를 해야지.

물론 내가 머리를 써서 1등을 했다기보단 운 좋게 지뢰를 피해간 덕분에 1등을 한 것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1위는 1위이지 않은가.

“아, 내 금지어가 ‘뭔데’였어?”

드디어 공개된 내 금지어는 나름 내가 자주 쓰는 말이긴 했다. 이번에 안 써서 그렇지.

“저희가 형을 너무 과소평가했어요. 평소에도 달고 사는 말이어서 당연히 퍼즐 내용 보거나 풀면서 ‘뭔데’를 입에 달고 살 줄 알았는데, 귀신같이 안 쓸 줄이야. 감이 무슨 짐승이에요, 아주.”

류재희가 툴툴거리며 고개를 짧게 저었다. 어쩐지 이번에 그 단어를 영 쓰기 싫더라니.

“그러니까 내가 ‘냐’로 하자고 했잖아. 아주 확실하게 이든이 형을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아니야. 어미는 금지어로 지정하기가 좀 그랬고, ‘아니’로 해도 충분히 윤이든 보내 버릴 수 있었어. 쟤는 모든 말의 서두를 일단 세상을 부정하면서 시작하잖아.”

“그냥 한국인 습관 아니에여?”

“그런데 ‘아니’는 윤 모 씨만큼이나 형도 많이 써.”

“진짜? 내가?”

“어, 예현이 형 또 금지어 썼다.”

다들 나를 보내 버리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또 이의 있습니다! 어째서 제 활약 점수가 이든이 형이랑 하나 차이밖에 나지 않는 거죠? 활약 점수의 기준을 밝혀 주세요!”

여전히 본인 점수가 납득이 가지 않는지, 류재희가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더욱 정확한 판정을 요구했다.

“문제를 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마다 점수가 부여되었습니다.”

“이 양반이 결정적인 역할을 저랑 비슷하게 했다고요?”

너는 형한테 ‘이 양반’이 뭐냐.

비록 내가 서예현한테 이 양반이라고 자주 하긴 하지만, 이런 것까지 내 카피캣이 될 필요는 없지 않냐, 막내야. 너도 설마 나를 형이라고 부르기 싫은 거냐? 어?

“예현 씨는 ‘CALL 311’ 퍼즐과 금고 비밀 번호, 그리고 엘리베이터 버튼 순서로 3점, 이든 씨는 카운터 파트에서 WELCOME 퍼즐과, LP판 퍼즐에서 정답을 맞춰서 2점, 유제 씨는 복도 올바른 문 퍼즐과 객실 요일 퍼즐, 엘리베이터 6-2 퍼즐로 3점, 도빈 씨는 노크로 문을 열어서 1점, 하준 씨는 텔레비전 채널 다이얼로 1점입니다.”

다들 납득할 만한 기준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여를 많이 했다니. 나도 이제 레브 두뇌 라인업에 합류하는 건가?

사실 김도빈과 견하준은 줄 점수가 너무 없어서 어거지로 쥐어 짜내서라도 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레브 최후의 두뇌 1인이 되어, 두뇌 싸움 서바이벌의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류재희나 서예현을 보내고 나는 둘 중 하나가 본선전에서 따온 브레인 그룹이라는 명예로 떵떵거리면서 꿀이나 빨려고 했는데.

내가 머리를 써야 하다니! 내가 류재희와 서예현을 두고 두뇌 싸움 서바이벌에 레브 대표로 나가야 하다니!

하지만 서예현의 막타를 스틸한 것에 후회는 없었다.

음악 관련 문제를 내가 못 맞추는 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이 본선 진출을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견하준이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싱긋 웃었다.

“축하해, 윤씨.”

이제는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게 되었다. 왜, 이제 한글 호칭은 더는 나올 게 없으니까 영어로 시선을 돌려서 Mr. 윤이라고도 해 보지?

서예현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대중들이 얘를 레브에서 제일 똑똑한 놈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럼 엄청난 하향 평준화인데?”

살다 살다 내가 레브 지능 수치 운명을 짊어지게 되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윤 군도 머리를 쓸 때는 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형. 정 그러면 나중에 재희랑 형이 이런 류 예능 한 번 더 나가서 활약 보여 주면 되지.”

…한글 호칭 더 나오네.

거리감 MAX를 찍은 호칭에, 단단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스르륵 풀었다. 턱 각도도 슬쩍 내렸다.

“준아, 대가리 박을까?”

결국 이번 활동이 끝나고 견하준이 좋아하는 가게에서 디저트 다섯 개를 사다 바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다시 내 호칭은 ‘이든아’로 돌아왔다.

서예현은 옆에서 세 개로 줄이면 안 되겠냐고 견하준에게 딜을 걸었지만, 견하준은 친구에게 ‘어이, 견씨’라는 호칭을 들은 충격은 디저트 세 개로 회복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금지어도 아닌 금지어 피하려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냐.

* * *

어쩌다 보니 레브의 최강 두뇌로 인정받은 나는 이제 본선전을 치러야 했다.

본선전은 연예계 브레인으로 손꼽히는 고정 패널들과 함께 진행했다.

내가 유일한 게스트였지만, 류재희가 내게 브리핑해 준 에 따르면 게스트보단 고정 패널들에게 훨씬 더 특정 역할을 많이 준다고 했다. 예를 들면 범인 역이라든지, 귀신 역이라든지.

들키지 않아야 해서 머리를 배로 굴려야 하는 특정 역할만 맡지 않으면 무난하게 묻어갈 수 있다나.

내가 본선전에서 두뇌로 활약하는 건 고칼로리 음식 먹방을 찍는 서예현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제발 이번에도 고정 패널이 특정 역할을 맡기만을 빌 뿐이었다.

촬영 전에 이번 촬영 의상이라고 지급 받은 옷은 교도소 죄수복을 연상시키는 주황색 점프슈트였다.

꼭 정석대로 입을 필요는 없다고 해서, 점프슈트의 상의를 느슨하게 벗어 소매를 허리춤에 묶어 고정시켰다.

이너로 입었던 반팔 티셔츠 소매도 어깨까지 말아 넣고 워커와 피어싱, 군번줄 목걸이로 포인트를 더했다.

어차피 머리싸움에서 밑천 드러낼 거, 패션쇼나 실컷 하고 오자는 취지였다.

“머리를 뒤로 까, 그냥 덮어?”

거울 앞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가 다시 헤집기를 반복하고 있자, 서예현이 질린 얼굴로 한소리 했다.

“두뇌 싸움 서바이벌에서 무슨 패션쇼하러 가?”

“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두뇌로는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못 찍을 거 같아서, 패션쇼로라도 딱 각인되게.”

“형, 본선 준비는 다 했어요?”

“자소서 질문은 다 외웠어.”

제작진 측이 내게 요구한 건 하나였다. 예선전 날에 작성했던 자기소개서 질문 외우기.

“앞머리 까는 게 좀 더 호락호락하지 않은 바보 같아 보여. 차라리 앞머리를 까고 가.”

서예현의 충고에 따라 앞머리는 까는 걸로 결정했다.

막상 촬영장에 가 보니 나뿐만 아니라 다들 패셔너블하게 점프슈트를 고쳐 입고 왔더라. 무난하게 정석대로 입은 사람이 더 눈에 띌 판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렇게 정석으로 입는 건 나 자신이 용납하지 못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정 패널들과의 인사가 끝나고-

“그럼, 본선전 《EXIT》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치 감옥 독방처럼 꾸며진 공간에 들어가서, 지급 받은 쪽지를 펼쳤다.

[당신은 간수입니다.

죄수들과 함께 탈출하는 척하며, 간수인 걸 들키지 말고 죄수들의 탈출을 막으십시오.]

…간수 다섯, 죄수 하나 아닐까?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