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653화

아주 다행스럽게도 복도에는 문짝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 칸에만 자물쇠가 달려 있는 세 칸짜리 서랍장과 복도 벽에 걸린 텅 빈 액자도 있었다.

서랍장 첫 번째 칸을 열어 보니 퍼즐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일단 이걸 맞춰 보자.”

서예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김도빈은 열심히 퍼즐을 맞춰 대고 있었다.

서예현과 견하준까지 퍼즐 맞추기에 합류하자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그려진 그림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퍼즐 크기는 액자에 딱 맞았다.

퍼즐을 액자에 담아 유리 덮개로 꾹 고정하고 다시 액자를 벽에 걸어 보니, 그림의 손이 문 하나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202호 가리키고 있는데요?”

“나도 그렇게 보여.”

우리가 열어야 하는 문이 어느 문인지 알게 되자마자 김도빈은 문짝 앞으로 가서 진지한 얼굴로 문을 두드려 댔다.

그러면 이제 노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찾으면 되겠군.

“두 번째 칸에 있는 이 문제를 풀고 세 번째 칸의 자물쇠를 열면 아마 노크 리듬이-”

덜컥-

문 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류재희의 설명을 끊었다. 열린 문 앞에 서 있던 김도빈이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류재희한테 말했다.

“열렸는데?”

류재희의 손에 있던 문제를 진지한 얼굴로 살펴보고 있던 서예현이 그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렸다고? 진짜? 진짜네?”

“뭐야? 어떻게 했냐?”

“도빈이가 하도 쳐 대서 인식 장치가 고장 난 거 아니야?”

견하준도 의심의 한마디를 보탰다.

“그냥 두드리니까 열리던데요? 제가 힌트 하나 아껴 드렸어요. 그러니까 제가 원할 때 힌트 한 번 써요.”

김도빈이 특유의 입 모양을 하고선 당당하게 웃었다.

“머리를 쓰라니까 운빨을 쓰고 있어… 우리도 좀 브레인 그룹으로 거듭나 보자고요.”

“운빨도 실력이야, 류… 햄스터.”

류재라고 부르려다가 황급히 호칭을 트는 김도빈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며 물었다.

“너 왜 나 따라 하냐?”

“같이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용.”

김도빈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김도빈의 말대로, 햄스터라는 단어에 내가 도금해 놓은 건 아니었으므로 그냥 가볍게 꼽만 주고 넘어갔다.

그리고 방 객실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흰색 마네킹의 모습에 쫄보 김도빈이 펄쩍 뛰었다.

“우왁, 깜짝이야! 공포 아니라며! 공포 아니라 스릴러라면서!”

흰색 마네킹이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살인 사건도 아니고 멀쩡하게 앉아 있는데, 왜. 평범한 마네킹 가지고 호들갑을 떨고 있어, 쯧.”

“야, 윤이든. 핏자국 이런 거 없어? 진짜?”

“막 움직이는 마네킹 이런 거 아니죠? 막 머리가 360도로 돌아간다든가…”

“깨끗하고 미동도 안 한다.”

혀를 차자 어느새 내 뒤에 숨은 서예현과 류재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내 뒤에서 양옆으로 흩어졌다.

객실은 평범한 호텔처럼 꾸며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문의 건너편에 키패드가 달린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예상컨대 저 문으로 나가야 하는 것 같았다.

탁자에는 룸서비스 메뉴판과 텔레비전 채널 목록이 올려져 있었다.

선반에는 레코드 플레이어와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고풍스러운 뻐꾸기 시계가 벽면 한쪽에 걸려 있었다. 뻐꾸기 시계 밑에는 스무 개쯤 되는 LP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은 채널 다이얼을 돌려서 채널을 바꿔야 하는 구식 아날로그 텔레비전이었다.

셋 다 퓨즈가 뽑혀 있었다.

나랑 김도빈, 류재희가 마네킹이 있는 쪽을 살필 동안, 견하준과 서예현은 침대와 옷장 쪽을 살피고 있었다.

“어이, 견씨! 거기 뭐 있어?”

돌아보며 견하준을 부르자 옆에 있던 김도빈이 한마디 했다.

“노가다꾼 윤씨 아저씨가 동료 아저씨 부르는 거 같아요.”

“뭐, 짜샤?”

인마도 금지어 후보군이었으므로 적당히 돌려 말하다가 충격 먹은 견하준의 표정과 마주했다. 아무래도 견씨라는 호칭이 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 어… 미안하다, 막둥아.”

볼을 긁적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금지어 피하려다가 우정 깨질 뻔?

“침대에는 뭐 없는 것 같은데? 그냥 평범한 침대인데?”

“침대 밑에 뭐 있지 않을까요? 음, 숨을 공간이 없는 침대네.”

슬쩍 몸을 숙여 침대 밑을 살핀 류재희가 혀를 찼다.

“여기 카드랑 금고 있어.”

옷장 안을 가리키며 말한 견하준이 한마디 더 슬쩍 덧붙였다.

“윤이든.”

“하준아, 그 정도로 되겠어? 윤가 놈아 정도는 돼야지?”

서예현이 옆에서 견하준에게 호칭 복수 코칭을 해 주고 있었다.

“대체 뭐부터 해야 하는 거지? 금고를 먼저 열어야 하나?”

“일단 수칙서부터 읽어보죠.”

[4. 객실 룸서비스는 월요일- 클럽 샌드위치, 화요일- 프렌치프라이, 수요일- 시저 샐러드, 목요일- 로스트 치킨, 금요일- 팬케이크, 토요일- 나초와 치즈 소스, 일요일- 티라미수만 가능합니다. 룸서비스를 주문하실 때에는 룸서비스 메뉴판의 메뉴 옆에 적힌 기호와 숫자를 정확히 입력해 주세요. 기회는 두 번뿐입니다.

5. 금고 안 열쇠를 꼭 챙겨 주세요.]

“금고도 열고, 룸서비스도 시켜야 한다는 소리군요.”

“일단 수칙이 더 앞 순번에 있는 룸서비스부터 시켜 보자.”

테이블 위에 고이 놓여 있는 룸서비스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ROOM SERVICE MENU

Available 24/7 – Dial “0” to order

#26- Caesar Salad

$12.00

#85- Club Sandwich

$16.00

#42- Roast Chicken

$22.00

#14- French Fries

$8.00

#67- Nachos with Cheese Sauce

$11.00

#50- Pancakes

$14.00

#93- Tiramisu

$10.00]

“오늘 월요일 아닌가?”

바로 오늘 날짜를 반사적으로 짚자 서예현이 한심하다는 눈길로 나를 보며 대꾸했다.

“오늘 요일만 알면 다 맞추도록 그렇게 단순하게 냈겠냐?”

틀린 말은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이거 하나씩 다 눌러 보면 되지 않을까?”

“기회가 두 번뿐이래요. 수칙은 항상 제대로 꼼꼼히 읽어야 해요, 형. 이게 만약 게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으면 형은 여기서 리타이어됐어요.”

김도빈이 진지하게 견하준한테 충고했다. 김도빈한테 충고받는 견하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게 실제상황이 될 일이 있나…? 방탈출 가는 게 아닌 이상은…”

“가라, 김도빈! 행운력을 다시 한번 뽐내 봐라!”

김도빈의 등을 떠밀며 선택을 종용하자 김도빈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에서 전원 탈락하면서 역적이 되고 싶진 않고요, 그냥 힌트 쓰죠?”

“그래요, 행운력은 무슨 행운력이에요! 머리를 쓰자고요!”

류재희의 재촉에 결국 힌트를 쓸 기회는 다시 무산되었다.

티비랑 전화기, 레코드 플레이어의 퓨즈부터 연결해 봤다.

티비 전원이 들어오며 화면이 회색 노이즈로 치지직거렸다. 티비 노이즈 소리와 채널이 입력되지 않은 화면은 객실에 스산함을 한결 더해 주었다.

“채널을 입력해야 하는 거 같은데요?”

류재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채널 목록을 집어 들며 말했다. 바로 티비 앞으로 다가간 김도빈은 리모컨 없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에 당황했다.

“리모컨이 없는데 이거 어떻게 채널 바꿔요?”

“여기 다이얼을 돌리면, 응, 이렇게 숫자가 바뀌는 거 같은데?”

견하준이 직접 다이얼을 돌려 목록 제일 위에 있는 채널 숫자로 맞추었다.

흑백 영상이 나타났다. 발레 영상이었다.

“다음은 146번이에요.”

계속해서 채널 목록에 있는 대로 다이얼을 맞춰 갔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흑백 영상들만 계속 나왔다. 앞부분만 짧게 계속 반복되고 있는 흑백 영상들은 아날로그 호러 감성이 아주 낭낭했다.

437로 채널을 맞추니, 앞선 영상들과 마찬가지로 흑백 영상이 재생되었다. 남성이 나타나 유쾌한 목소리로 외쳐 댔다.

-May 1st, it’s the Joyful Saturday Talk Show!

채널 목록에 있는 다른 채널들을 마저 틀어 봐도 날짜와 요일이 나오는 영상이 재생되는 채널은 이거뿐이었다.

“토요일 토크 쇼래. 토요일인가 봐.”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0번을 입력해 토요일에만 시킬 수 있는 나초와 치즈 소스 #67번을 입력하자 낭랑한 기계음이 돌아왔다.

-잘못 누르셨습니다.

전화가 바로 뚝 끊겼다.

“오답인 거 같은데?”

다들 30초 텀을 피하기 위해 시끄럽게 한마디씩 얹는 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류재희가 파득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투숙객 기록 look 해 봐요. 저 토요토크쇼 방송에 함정이 숨어 있을 수가 있어요.”

‘봐 봐요’라는 금지어를 피하기 위한 발버둥이 참으로 가상했다.

“202호, 투숙객 이름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름은 패스하고, 체크인 5월 3일, 체크아웃 5월 4일.”

“저게 재방송일 수 있잖아. 그러면 5월 1일이 토요일이니까 3일과 4일은 월요일, 그리고 화요일이겠네.”

지금까지 활약한 건수가 0인 서예현이 본인 공을 하나라도 세우고 싶었는지 재빨리 요일을 계산했다.

“만약 연도가 다르면 어떡해. 저게 1, 2년 전 토크쇼면?”

“거기까지 꼬아 놓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몇 년 전 것인지 끝도 없잖아요. 머리만 아프죠.”

류재희가 내 가설을 단호하게 잘라 냈다. 출제자의 의도까지 파악하다니, 역시 레브의 두뇌다웠다.

“그러면 월요일과 화요일 중 하나네.”

“으아아, 방금 시도만 안 했으면 둘 다 눌러 볼 수 있었는데. 진짜 아깝다.”

서예현이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약하게 쥐어뜯으며 한탄을 내뱉었다.

“이때야말로 힌트를 써야 할 시간 같아요.”

“시간…? 시계!”

어김없이 힌트무새가 된 김도빈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류재희가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짝! 손뼉을 쳤다.

“시계가 왜? 저거 떼어 와?”

“아니요, 떼어 오지 말고요. 힘 쓰는 거 아니에요. look 해 봐요. 명부에 따르면 체크인 시간은 오후 3시, 체크아웃 시간은 오전 11시잖아요. 그런데 지금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12시예요.”

알아들은 건 절반 남짓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네킹이 있으니까 이 객실 주인은 체크인을 했고 아직 체크아웃은 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정오는 체크인 시간이 아직 안 되거나 체크아웃 시간에서 넘어갔으니까 이 12시는 자정일 거고, 자정에는 날짜가 넘어가니까 오늘은 5월 4일, 화요일이에요!”

“이야, 햄스터!”

똑 소리 나는 추론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류재희한테 달려들어 머리를 마구 헝클여 대거나 등짝과 어깨를 두드려 댔다. 좋아, 우리 막내 덕분에 적어도 레브가 방송에 빡대가리 그룹으로 비치지는 않겠군.

“형들도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다고요. 저한테 두뇌 외주 주지 말고 제발 형들 머리를 써요, 머리를. 본선도 두뇌 싸움 서바이벌이라고 벌써 지레 포기한 거예요?”

류재희는 칭찬의 손길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툴툴거렸다.

프렌치프라이의 번호인 #14번을 입력하니 수화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들으며 주먹을 불끈 쥔 서예현이 누군가에게 뺏길세라 후다닥 LP판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가서 LP판을 전부 가져왔다.

“나 이제 뭔지 알겠어. 이 LP판에서 이 음악이랑 똑같은 걸 찾으면 돼. LP판을 하나씩 틀어 보면-”

“굳이 틀어 볼 필요 있냐? 딱 들어도 쇼팽 녹턴 2번인데.”

서예현의 말을 끊고 서예현이 가져온 LP판 중 하나를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어엉, 공 막타 스틸 달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