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잃은 아이돌을 위한 회귀 백서 648화

물론 이건 서로를 칭찬하는 훈훈한 장면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잘한 점 칭찬하고 있으면 알테어지, 레브냐?

이건 그저 누가 제일 퇴물 발언에 긁혔는지 몰아가는 과정 중 하나였다.

결론은, 잘하지도 못하는 윙크까지 무대 위에서 시도한 견하준이 결국 만장일치로 제일 긁힌 놈으로 몰렸다.

나도 기왕이면 무대에서 갑자기 DTB 참가자에 빙의한 서예현으로 밀고 싶었는데, 안무에도 없던 윙크는 못 이기지.

“그런데 진짜 윙크는 왜 시도한 거야?”

정말로 궁금했는지 서예현이 슬쩍 견하준에게 물었다.

“그냥… 여유로운 느낌을 내는 게 윙크밖에 안 떠올라서. 그마저도 잘 안됐지만…”

견하준이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강조하듯 덧붙였다.

“절대 퇴물이라는 소리에 긁혀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저 완벽한 무대를 만들고 싶었던 것뿐이야. 오해하지 마.”

저러니까 더 긁힌 거 같구나. 가오를 위해서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입을 닫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참으로 훌륭한 반면교사였다.

당분간은 윙크가 레브 내에서 유행일 것 같았다. 안 봐도 뻔했다. 벌써 윙크를 남발하고 있는 막내 라인을 봐라.

그나마 누르기 편한 김도빈의 정수리를 꾹 누르며 타박했다.

“인마, 윙크 연속으로 성공시켜서 윙크 못 하는 하준이가 그렇게 상대적 박탈감이 들게 만들면 쓰냐?”

견하준이 ‘이든이 너마저…!’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나는 견하준을 위한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왜 배신 당한 표정을 짓고 그러지? 이러면 내가 수많은 ‘준아, 너마저…!’에 복수한 쪼잔한 놈이 되어 버린 것 같잖아.

마지막 순서인 터라, 숨 고를 틈도 없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이번 주 W카운트다운 1위를 한 신드롬을 축하해 주고 VXTR 후배들의 왜인지 모를 초롱초롱한 시선들을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완벽하게 발렸어도 저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들을 보니, 저 그룹 앞에서는 절대로 “아, 진짜요” “아, 정말요” “아, 그렇구나” 등의 금지어를 절대 내뱉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엇다.

컴백 첫 음방 무대 스케줄이 끝나고 곧바로 컴백 기념 라이브 방송이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일몽이들, 너무 보고 싶었어요!”

한 10년 만에 본 것처럼 애절한 얼굴로 데이드림을 반기는 류재희는 4개월 전에 솔로 앨범으로 활동한 녀석이었다.

저 얼굴을 하고 팬들을 맞이해야 할 서예현과 김도빈은 정작…

“이번에는 텀이 살짝 길었죠? 계속 한두 달 차이로 컴백하다가 네 달 텀을 두니까 그 네 달이 유독 길게 느껴지긴 하네요.”

“그래도 올해 계속 데이드림 꾸준히 만났으니까! 물론 완전체로 컴백해서 만난 지금이 제일 좋지만요!”

-이러고 있었다. 혹시 둘만 솔로 활동을 하지 않아 섭섭해하는 본인들의 개인팬들을 속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서예현은 몰라도 일단 김도빈의 머리로는 불가능한 생각 같긴 한데. 너무나도 꿈보다 해명 같은 소리이긴 한데.

멤버들 솔로 앨범이 나올 때마다 나머지 네 명이 스페셜 게스트로 라이브 방송에 출연하긴 했지만, 거의 근 1년 만에 완전체 컴백으로 다 같이 팬들 앞에 서는 것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솔로 릴레이를 완전체 컴백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희가 4월에 하준이 형부터 스타트를 끊은 릴레이 솔로 활동을 마무리하고, 11월에 드디어 레브 다섯 명이 미니 5집 [RE-HI]로 돌아왔습니다, 와-. 이든이 형, 타이틀곡 한 번 소개해 주시죠.”

드디어 내게 온 찬스에, 목을 가볍게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네, 은요 곡 제목 때문에 서정적인 곡이라고 생각하신 분들도 계시던데, 사실 번아웃이라는 단어 자체가 소진, 무기력, 이런 식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잖아요. 그런데 이걸 뒤집어서, 단어 그대로 해석을 한 거거든요. ‘다 불태웠다.’ 그러니까, 저희가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쭉 뜨겁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담긴 곡입니다. 장르는 스트릿 댄스팝이고요, 틴팝 느낌을 추가했던 과는 달리 이번에는 저희의 성장을 보여 드리기 위해 틴팝 느낌은 뺐습니다.”

음방에서 짧게 설명해야 했기에 곡 설명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마음껏 라이브 방송에서 풀어냈다.

“사실 이제 컨셉이 과거의, 초심의 재현이다 보니까 멜로디 샘플링을 집어넣을까도 했는데… 멜로디 라인이 겹치는 것보다는,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느낌을 내면서 새로움과 신선함을 선사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결과물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양쪽에서 내 옷소매와 옆구리 쪽 옷을 슬쩍 흔드는 손길에도 꿋꿋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혼자 신나신 전공 교수님 강의 듣는 기분을 내돌 라방에서 느끼다니

-이든이 눈 빛나는 거 봐ㅋㅋㅋㅋ 6년차에도 이렇게 생태눈인 돌이 있다?!

-글쿤

-뮤비촬영 비하인드 궁금해요

“아, 그리고 수록곡인 은-”

“ 후속곡이에요. 는 사랑해, 은 나도 사랑해 줘.”

옆에 있던 류재희가 잽싸게 내 말을 스틸하여 설명을 요약본으로 대신했다.

“이건 샘플링을 삽입했다는 것도 설명해 드려.”

“네, 그렇대요.”

설명을 더 하고 싶어 근질근질해하는 내 입을 발견했는지 류재희가 누구보다 빠르게 앨범명 설명으로 넘어갔다.

“앨범 제목은 이든이 형 아이디어예요. 도빈이 형도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긴 했는데, ‘BACK TO 20XX’, ‘REVE AGAIN’ 이런 거라서 이든이 형이 다 탈락시켰어요.”

“좀 young한 느낌을 내고 싶어서 그래도 레브에서 나름 막내 라인인 도빈이에게 아이디어 좀 내 보라고 했더니 저런 대답이 돌아와서 매우 당황스러웠죠. 지자체 축제 홍보 문구 같다고요? 저도 딱 그 생각 했는데. 통했네요.”

잔소리 타겟이 된 김도빈이 잽싸게 화제 돌리기를 시도했다.

“데이드림, 여기에서 퀴즈! 이든이 형이 이번 앨범명에는 의미 몇 개 담았게요?”

그런 김도빈을 향해 타박을 날렸다.

“내가 맨날 앨범명에 중의적인 의미 담는 줄 아냐?”

“그러면 이번에는 단일 의미야?”

견하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앨범인 [RE-HI]도 중의적 의미는 맞았다. 그저 김도빈의 말에 습관적 반박을 했을 뿐이다.

“다시 인사드린다는 의미의, RE-HI, 그리고 저희 데뷔 초 미니 2집이랑 2집 리패키지 앨범 이름이 HI-TN이랑 HI-LIGHT였잖아요. 그 앨범들을, 그 앨범으로 활동한 시간을 다시 재현한다는 의미의 RE-HI입니다.”

진지한 얼굴로 설명하자 류재희가 굉장히 감명 깊은 얼굴로 진지하게 내게 권유했다.

“형, 평소에도 그렇게 머리를 써 보는 게 어떨까요. 형도 이런 심도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 지금 보여주고 있잖아.”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김도빈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류재,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서 뭘 모르는구나. 이든이 형이 심도 깊은 생각을 할 때는 오직 음악 관련과 네가 없는 예능에서뿐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라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번 뮤직비디오에는 5년 만에 후속 떡밥이 나왔는데요, 다들 어떻게 성장하셨죠?”

인기뮤직 MC에서 하차한 지 좀 된 류재희는 라방에서 MC 기질을 마음껏 보여 주고 있었다.

“저는 이제 유명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된 설정이고요.”

“저는 무사히 대학 진학을 했네요.”

“내가 뭐였지? 일단 배우랑 가수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유명 모델이 되었다는 설정이었던가? 나 모델 맞지?”

“K-pop 스타 아닐까요?”

서예현이 본인 설정을 헷갈리는 일이 있었지만 김도빈의 기지로 무사히 넘어갔다.

“저는 좀 현실적이고 어두운 설정이네요. 프로 농구선수의 꿈을 접고 취미로만 농구를 즐기는 어른으로 자랐거든요.”

“그러게, 그때보다 키는 훨씬 더 컸는데.”

“청소년 때 기량이 중요한데 키가 너무 늦게 커서 그래. 네가 고 3때 컸냐, 졸업 시즌에 컸냐? 아무튼, 성인 다 돼서 컸잖아.”

류재희의 차례에서는 잠시 류재희의 성장을 두고 추억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제일 궁금하셨을 저는! 여전히 톱 인플루언서 설정이에요. 백수 아니에여.”

후속 떡밥의 끝과 곡 오프닝을 맡은 김도빈의 설정은 일단은 그랬다.

“뮤비 촬영할 때, 쉬는 시간에 도빈이 형 브이로그 감성 찍어 놓은 거 있는데 나중에 편집해서 올려 볼게요. 진짜 웃겨요.”

“아니, 예현이 형이 제 곡을 못 맞춰 놓고 또 베스트 곡으로는 제 걸 골랐다니까요? 이게 뭐냐고.”

“제 머리는 쟤 곡을 찾지 못했어도, 제 귀가 본능적으로 알아들은 거죠.”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뮤직비디오 촬영 중 있었던 이야기와 컴백 준비를 하며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풀어놓았다. 서예현의 블라인드 테스트 에피소드도 여기에서 탈탈 털렸다.

“아, 데뷔 페이크 다큐멘터리요? 그거 프로모션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타이밍이 얻어걸린 거라서. 그런데 타이밍 진짜 기막히지 않아요?”

“도빈이 형 운빨이 또 작용했죠. 원래 이것까지 설계한 레브의 빅픽쳐로 밀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 일몽이들 기만하는 거 같아서 그냥 솔직히 고백하는 거예요.”

언제나 데이드림한테는 솔직한 레브였다.

* * *

컴백 기념 라이브 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차 안.

드디어 기다리던 차연호의 답장이 도착했다.

[차연호- 정준이 살리는 거] 오후 11:30

[차연호- 기한은 정준이가 1, 2회차에 죽었던 날까지] 오후 11:31

차연호가 위험도 시스템과 한 내기 내용과 기한이 문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답장을 며칠간이나 미루길래 무슨 내기인지 못 알아들은 줄 알았더니, 정확히 알아들은 게 참 의외였다. 내가 차연호의 지능과 눈치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싶었다.

‘그러면 남은 기한은 앞으로 3년인가.’

내가 스물여덟 살에 벌어졌던 일이었으니. 현재 내가 스물다섯의 끝을 지나고 있는 걸 따져 봤을 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은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차연호의 말을 전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차연호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의심보다는, 차연호 지능상 뭔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시스템의 조작질로 인해 기억이 비틀렸을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기한이 훅 줄어들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차연호가 늦게 답장한 게 다행이군.’

만약 케이제이가 차연호의 휴대폰을 보기 전에 이 답장을 보내고 이걸 바로 지우지 않았으면 본인 죽음 운운하는 저 문자를 딱 마주했을 거 아닌가.

과연 차연호는 본인 폰이 케이제이에게 털린 걸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정준이가 문자 봤다고 난리 치지 않고 태평하게 답장이나 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모르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아니, 잠깐만. 그러면 케이제이는 차연호 폰 비밀번호도 알고 있다는 소리 아니야? 케이제이가 저 문자를 볼 위험성이 지금도 매우 높은 거 아니냐고.

[폰 비밀번호는 주기적으로 바꾸고 사냐?] 오후 11:36

[웬만하면 하루에 한 번씩은 바꿔라] 오후 11:37

차마 다이렉트로 말하지는 못하고 돌려 돌려 말해 주자 왜인지 텍스트인데도 비웃음이 들리는 것만 같은 답장이 도착했다.

[차연호- 누구한테 폰 털릴 뻔하기라도 했나 봐?] 오후 11:39

아니, 내가 털릴 뻔한게 아니라 네가 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