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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 Mắt Hay Ra Đi Raw - C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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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47화
앞에선 지극히 정상적인 팬사인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으악 너무 잘생겼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내 앞 사람을 상대하는 류청우는 이 모든 난장판을 파악한 것이 분명함에도 흔들림이 없다.
저놈은 확실히 프로다.
그리고 나는….
[혀, 형! 빨리 절 조종해요!]
류청우에게서 넘어온 팬이 자신의 앞에 앉자 패닉 상태에 빠진 큰달이 미친 듯이 쏟아내는 팝업을 보고 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명령하기 시작했군. 이해한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 내가 부르는 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거야.’
이 팬사인회는 기업 주최라 스탭이 달라서 빠릿빠릿하게 팬들을 앞으로 배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도리어 빠른 템포의 일반적 팬사인회처럼 미친 순발력은 덜 필요한 장점도 있는 것이다.
넌 할 수 있다!
[네!]
하지만 직후, 떨리는 팝업이 다시 떴다.
아마 의식의 흐름처럼 쓴 것 같았다.
[…근데 이분은 형을 보러 오셨는데, 제가 해도 괜찮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
[헉,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 우는 소리 해서… 더 생각 안 할게요!]
아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나도 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우리가 더 잘 맞추면 된다.
‘넌 라디오에서 거의 날 똑같이 연기했어.’
몸이 테스타 박문대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나도 시야도 공유 중인 상황이니까, 충분히 이 사람이 기대한 경험을 구현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안다. 저 사람도 그냥 AI 비서를 사는 김에 한번 기분 삼아 넣어봤다가 당첨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진짜 팬일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지금 내가 보낼 말도 그렇게 전달해 주면, 그분은 정말로 테스타 박문대를 만난 게 될 거야.’
실제로, 바로 옆에서 내가 말을 듣고 있기도 하다.
‘그런 경험을 하실 수 있게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네!!]
좋아.
나는 심호흡한 뒤, 실시간 반응을 위해 만전의 태세를…….
“문대야~ 그 라디오에서 보여줬던 러뷰어 연기 있잖아, 한 번만 해주면 안 돼? 나 너무 보고 싶어!”
‘…….’
[…….]
‘잘 부탁한다.’
[넵.]
그렇게 큰달은 첫 턴을 무사히 넘겼다.
‘다음 사람 받기 전에 펜이 안 나온다고 하면서 살짝 시간 끌라고 말해뒀고.’
그리고 결국 내 턴이 돌아왔다.
류건우 앞사람이… 다 빠진 것이다.
‘…후.’
나는 휑한 앞을 보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긴 탁자로 향했다.
털썩.
류청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 시야는 또 처음이다.
‘여기서 보면 이런 느낌인가.’
매번 반대편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런 구도도 새삼스럽군.
그리고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그래서 눈을 마주쳤다.
류청우는… 웃었다.
‘…웃어?’
“형, 어떻게 왔어요?”
“……!”
“그냥 연락하면 되지, 깜짝 놀랐네.”
그렇지.
류건우는 류청우의 친척이다. 그럼 이게… 자연스러운 건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자연스럽게 간다.
나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가족으로 보는 거랑 아이돌로 만나는 건 좀 다르니까. 그래서 응모해 봤어. 내가 너희 팬이잖아.”
생각해 보니 차라리 고맙다. 좀 더 뻔뻔하기 쉬워지는군.
류청우는 폭소하진 않았다. 단지 온화하게 물었을 뿐이다.
“그렇게 팬이야?”
“어. 내가 퇴근하면 하는 게 테스타 컨텐츠 돌려보는 거야.”
주어가 나든 큰달이든 거짓 한 점 없는 깨끗한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는지, 류청우는 여기서 터졌다.
“하하하!”
“하하.”
나는 따라 웃으려 노력하며 사인지를 다시 내밀었다. 류청우는 반사적으로 사인을 하면서도 웃고 있다.
‘그만해라.’
친척인 게 SNS에 뜨기 전에 그만하라고.
“어떤 컨텐츠가 제일 좋았어요?”
그렇다고 다 아는 놈이 진짜 팬 온 것처럼 대응하지도 말라고.
“다 좋지. 며칠 전에 라디오 나온 것도 웃기고.”
“아, 그랬어?”
류청우는 웃으며 사인을 마치고, 마치 P.S를 달 듯이 가볍게 사인지 위에 글을 써서 넘겼다.
“여기.”
-다른 애들한테 바로 전해둘게. 걱정하지 마.
이건…….
“고맙다.”
“뭘.”
과연 인성과 침착함은 나무랄 곳 없는 녀석이었다.
‘리더를 잘 뽑아놨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으로 넘어갈 준비를…….
[아아, 맞다 형! 저 그 팬싸 아이템 가져왔는데요! 다들 한다고 하셔서….]
“…….”
아이템?
그러고 보니… 하도 상황이 지랄맞게 돌아가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내가 지금 손에 뭘 들고 있다.
‘…쇼핑백.’
안 좋은 예감이 든다.
하지만 이걸 안 주면… 내가 이놈 하루를 정확히 따라 하지 못해서, 미션 실패 해제가 어긋날 수 있다는 그 판단.
그것 때문에 나는 군말 없이 백 안에 손을 넣었다.
보기 편하게 ‘류청우’라고 택까지 붙여 놨다. 팬사인회 중에 혼잡해서 못 찾을까 봐 한 건가.
‘아무러면 어떠냐.’
나는 거칠게 소품을 꺼냈다.
그건…… 갓이었다.
“…….”
그 조선 시대 그거.
‘근데 무슨 디테일 고증을 이렇게까지 했냐.’
이거 관리들이 쓰던 전립인가 하는 그 갓 아니냐? 이런데 쓰라고 내가 복권을 당첨…… 아니다. 본인이 행복하다면야 됐다.
내가 줘야해서 문제지.
“아, 이거 쓰면 돼?”
그래라.
류청우는 알아서 자기가 직접 갓을 가져다가 머리에 얹었다.
내 앞 순번이었던 햄스터 머리띠 쓴 고등학생이 순간 옆에서 엄지를 치켜든다.
“완전 찰떡이에요…!”
제가 고른 게 아닙니다.
“하하, 고마워, 형.”
어쨌든… 첫 멤버, 류청우에게 사인받기는 무사히 완료된 것 같다.
“또 와.”
안 와.
하지만 바로 류청우 다음 타자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게 바로 박문대였기 때문이다.
내가 핑계 대며 대기 시간을 끌라고 한 것을 착실히 이행한 덕에, 그놈은 지금에서야 내 앞 사람 사인을 막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박문대’에게 하는 인사말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덜 떨린다.
게다가 류청우를 대할 때보다도 태도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박문대 팬이 아니란 뜻이다.’
다행이었다.
나는 큰달에게 대응 문구를 팝업으로 띄우면서도 약간 안도했다.
박문대에게 별로 관심 없을 테니, 큰달이 대충 친절하게 하면 비비고 넘어갈 수 있겠…….
“아 맞다, 저기… 저 그 티벳여우 표정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
이건… 내가 지시해 줄 수 없는 부분인데.
결국 나는 큰달이 최선을 다해서 무표정한 무언가를 따라 하기 위해 애쓰는 꼴을 물끄러미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평소에 저런 표정인가 보다. 반성하겠다.
그리고 곧 녀석은 무너졌다.
“죄, 죄송해요… 좀 어색했죠.”
‘오.’
그런데 그것도 제법… 음, 역시 원래 몸 주인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군.
“…!! 아뇨! 귀여웠어요! 오빠 완전 귀여워요!”
“…?? 감사합니다….”
[형, 죄송해요. 제가 좀 망친 것 같은데요ㅠㅠ]
‘너 이쪽 일 한번 해볼 생각….’
[네?]
‘아니다.’
7급 붙은 로또 당첨자한테 헛바람 넣을 뻔했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자리를 이동했다.
털썩.
그래서 이제 나는… ‘세계제일 사과말랑이’라는 말풍선 모자를 쓰고 강아지 귀를 단 박문대 앞에 앉아 있다.
본인 대면.
굉장히 희한한 기분이다.
하지만 우리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어디 보자.’
나는 양손을 깍지 끼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문대 씨… 평소에 정말 응원하고 있어요.”
“푸흑.”
“저기, 데뷔 전부터 제 최애세요! 아, 이렇게 쓰는 게 맞죠…? 최애!”
“예…. 맞습니다. 감사합니닥…….”
방금 발음이 뭉개진 것 같지만 양호했다. 이대로만 가면 될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놈 내 사인을….
“사인… 여기 있습니다.”
아주 그럴싸하게 잘 쓰는군. 이젠 놀랍지도 않다.
‘따로 연습했냐.’
[아아뇨, 몸이 기억하더라고요. 진짜 신기했어요….]
아, 그런 거였나.
아무튼, 나는 정다운 팬사인회 대화를 계속했다.
“진짜! 감사합니다. 저, 다음 활동도 꼭 챙겨볼게요…!”
물론 아이템도 잊지 않았고.
“그리고 혹시… 이거 써주실 수 있을까요? 헉, 싫으시면 안 쓰셔도 괜찮고요!”
“……싫을 리가요. 귀엽네요.”
[…형 그렇게까지 절 따라 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크흐흑…….]
최선을 다 해봤다.
나는 큰달이 자신의 머리 위로 금색 왕관을 간신히 올리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
나 자신에게 사인받기 완료.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멤버들이군.
내가 큰달에게 사인받는 사이에 류청우가 다른 녀석들한테 뒤쪽으로 속삭인 것을 보긴 했다.
그리고 박문대의 옆자리는 바로… 배세진이다.
‘침착한 녀석이니 초반 타자로 괜찮군.’
나는 의자를 옮겼다.
그러자 배세진이 움찔했다.
“…….”
“…….”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이미 소식을 전해 듣긴 한 모양인데, 왜 이렇게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냐.
‘연기라고 생각을 안 해서 그런가.’
그럼 좀 분위기라도 푸는 편이 낫겠지.
나는 순간적인 판단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기억하세요? 그때 화장실에서 인사드린 적 있는데…….”
“…! 아, 아, 예.”
“그때보다도 더 멋있어지셨어요.”
“감사합니다….”
배세진은 좀 놀란 것처럼 나를 훑어보았다.
‘긴장 풀렸냐.’
그러나 녀석은 도리어 뭔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침을 삼키고 사인지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저, 그때 큰 힘이 됐습니다. 사실 제 팬이 아니라고 하시더라도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꼭 고맙다는 말을 드려보고 싶었습니다.”
“…….”
“오늘 팬사인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To. 류건우’로 사인을 완성한 배세진은 사인지를 내밀었다.
‘나 참.’
“저야말로 꾸준히 활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세진 씨 팬 맞고요.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예.”
나는 배세진과 악수했다.
제법 힘찬 느낌이었다.
‘괜찮군.’
그렇게 녀석과의 대화가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이번에도 하나 남았다.
‘아, 아이템.’
그래서 쇼핑백을 뒤지자 나온 것은….
‘…햄스터 머리띤데.’
나는 고개를 들어, 배세진을 보었다.
“…?”
“아뇨.”
이미 배세진의 머리에는… 햄스터 머리띠가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아까 고등학생의 머리에 있던 그거 말이다.
‘겹치는군.’
큰달의 아이템은 도로 쇼핑백에 넣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눈치싸움에서 패배한 순간 끝난 승부다.
그렇게 나는 다음 녀석에게로 넘어갔다.
팬사인회, 중앙에 앉은 녀석은 바로….
“안녕하세요…!”
선아현이다.
선아현은 제법 믿음직한 얼굴로 앉아 있다.
지난 라디오 경험을 돌이켜봤을 때, 이 녀석과 별다른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사람 놀려먹을 놈도 아니고.
나는 약간 긴장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네, 안녕하세… 큼.”
다만 긴장 상태로 몇 분 떠들어서 그런지 헛기침이 나왔다. 그래서 빠르게 목을 가다듬는데….
선아현이 허겁지겁 자신의 옆에 있던 새 음료를 집어다가 건넸다.
“…! 물, 여기… 아, 녹차도 있어요…!”
갑자기 역조공을?
‘잠깐.’
순간 사이버 렉카 타이틀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선아현 팬 차별 논란] 팬싸에서 머글 남자만 특별대우한 선아현?
안 된다.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좀 긴장해서 그래요. 제가 테스타 데뷔 전부터 팬인데 팬사인회 오는 건 처음이라서요.”
“아….”
선아현이 황급히 물을 치웠다.
‘안 돼.’
분위기 어색해지는 것도 안 된다. 안 그래도 회장에 성인 남성이 거의 없는데 더 눈에 띌 순 없다고.
나는 결국…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기 위해 ‘그것’을 선택했다.
“그보다 혹시 이거 써주실 수 있을까요.”
바로 아이템 선지급이다.
“……그럼요.”
선아현은 머뭇거리며 사슴뿔이 달린 화관을 받아다가 머리에 썼다.
“아아악!”
“아현아! 여기!”
뒤에서 온갖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납득했다. 기가 막히게 어울리긴 했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샀냐.’
[아, SNS에서 주문 제작 받으세요!]
‘…?’
진짜 물어본 건 아니었다만, 뭐 알았다.
어쨌든 나는 일부러 몸을 살짝 돌려서 선아현 홈마들이 컷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한 다음, 선아현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그리고 사인지에 녀석이 남긴 글을 읽으며 시간이 끝났다.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요. 앞으로도 더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화이팅!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뜻이다.
이다음은….
“안녕하세요~”
“예.”
큰세진이니까.
놈이 싱글벙글 싹싹하게 웃었다.
그리고 사인지에 보지도 않고 펜을 움직이며, 굳이 입도 같이 움직이는 스킬을 선보이는 중이다.
“와~ 어떻게 오셨어요?”
“테스타 팬이라서요.”
“어휴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 팬이세요?”
“문대요.”
“큽.”
큰세진이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속으로 무수한 ‘ㅋ’이 지나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더 열받는…… 아니, 참자.
“와~ 두 분 좀 닮으신 것 같아요!”
“아 진짜요? 생전 처음 듣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왜요! 원래 사람은… 크흡, 자기 닮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잖아요~ 왜 그런 말도 있고!”
큰세진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팬이다~”
“크흡!”
옆에서 김래빈이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사인지에 뿜는 것은 피한 모양이다.
“…….”
나는 심호흡했다.
그리고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저는 올팬입니다.”
“흡.”
웃지 마.
“세진 님 팬이기도 하고요. 세진 님도 문대랑 많이 닮으신 것 같아서 그런가.”
“…….”
“응원합니다. 워낙 다방면으로 멋지시기도 하고.”
“…아, 네. 음~”
큰세진은 결국 좀 멋쩍은 표정으로 양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이긴 기분이군.
나는 놈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왔다.
김래빈.
녀석은…… 진지했다.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누가 보면 협박당하는 줄 알겠군.
아무튼, 뭘 말하든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녀석에게 나도 진지하게 요구사항을 읊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멋진 활동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옙.”
“컨디션 관리를 위해 푹 쉬시기도 하시고요.”
“물론입니다.”
“기왕이면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밤 12시 이전에 좀 주무셨으면 더 좋겠는데.”
“…??”
그러다 서른 넘으면 개고생한다.
“그리고 이것 좀.”
“아, 예.”
나는 자연스럽게 봉투에서 ‘김래빈’이라고 이름표가 붙은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이쯤 되니 관록이 붙었는지 체념한 건지는 모르겠다.
‘이제 이걸 건네면…….’
“…….”
“……음.”
근데 이게 뭐냐.
무슨 허연 실리콘 덩어리 같은 게….
[아, 귀에 하는 거예요!]
“아, 귀에 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이어커프인가 봅니다.”
하마터면 주는 놈이 물건 정체를 모르는 이상한 상황이 될 뻔했다.
나는 김래빈이 뽀송뽀송한 천사 날개를 귀에 다는 것을 확인하며,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지막 타자만 남았다.
“Hi~”
차유진.
이미 내 전 사람과 손깍지까지 껴가며 끝내주는 팬사인회를 즐긴 놈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47화

앞에선 지극히 정상적인 팬사인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으악 너무 잘생겼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내 앞 사람을 상대하는 류청우는 이 모든 난장판을 파악한 것이 분명함에도 흔들림이 없다.

저놈은 확실히 프로다.

그리고 나는….

류청우에게서 넘어온 팬이 자신의 앞에 앉자 패닉 상태에 빠진 큰달이 미친 듯이 쏟아내는 팝업을 보고 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명령하기 시작했군. 이해한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 내가 부르는 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거야.’

이 팬사인회는 기업 주최라 스탭이 달라서 빠릿빠릿하게 팬들을 앞으로 배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도리어 빠른 템포의 일반적 팬사인회처럼 미친 순발력은 덜 필요한 장점도 있는 것이다.

넌 할 수 있다!

하지만 직후, 떨리는 팝업이 다시 떴다.

아마 의식의 흐름처럼 쓴 것 같았다.

“…….”

아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나도 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우리가 더 잘 맞추면 된다.

‘넌 라디오에서 거의 날 똑같이 연기했어.’

몸이 테스타 박문대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나도 시야도 공유 중인 상황이니까, 충분히 이 사람이 기대한 경험을 구현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안다. 저 사람도 그냥 AI 비서를 사는 김에 한번 기분 삼아 넣어봤다가 당첨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진짜 팬일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지금 내가 보낼 말도 그렇게 전달해 주면, 그분은 정말로 테스타 박문대를 만난 게 될 거야.’

실제로, 바로 옆에서 내가 말을 듣고 있기도 하다.

‘그런 경험을 하실 수 있게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좋아.

나는 심호흡한 뒤, 실시간 반응을 위해 만전의 태세를…….

“문대야~ 그 라디오에서 보여줬던 러뷰어 연기 있잖아, 한 번만 해주면 안 돼? 나 너무 보고 싶어!”

‘…….’

‘잘 부탁한다.’

그렇게 큰달은 첫 턴을 무사히 넘겼다.

‘다음 사람 받기 전에 펜이 안 나온다고 하면서 살짝 시간 끌라고 말해뒀고.’

그리고 결국 내 턴이 돌아왔다.

류건우 앞사람이… 다 빠진 것이다.

‘…후.’

나는 휑한 앞을 보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긴 탁자로 향했다.

털썩.

류청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 시야는 또 처음이다.

‘여기서 보면 이런 느낌인가.’

매번 반대편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런 구도도 새삼스럽군.

그리고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그래서 눈을 마주쳤다.

류청우는… 웃었다.

‘…웃어?’

“형, 어떻게 왔어요?”

“……!”

“그냥 연락하면 되지, 깜짝 놀랐네.”

그렇지.

류건우는 류청우의 친척이다. 그럼 이게… 자연스러운 건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자연스럽게 간다.

나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가족으로 보는 거랑 아이돌로 만나는 건 좀 다르니까. 그래서 응모해 봤어. 내가 너희 팬이잖아.”

생각해 보니 차라리 고맙다. 좀 더 뻔뻔하기 쉬워지는군.

류청우는 폭소하진 않았다. 단지 온화하게 물었을 뿐이다.

“그렇게 팬이야?”

“어. 내가 퇴근하면 하는 게 테스타 컨텐츠 돌려보는 거야.”

주어가 나든 큰달이든 거짓 한 점 없는 깨끗한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는지, 류청우는 여기서 터졌다.

“하하하!”

“하하.”

나는 따라 웃으려 노력하며 사인지를 다시 내밀었다. 류청우는 반사적으로 사인을 하면서도 웃고 있다.

‘그만해라.’

친척인 게 SNS에 뜨기 전에 그만하라고.

“어떤 컨텐츠가 제일 좋았어요?”

그렇다고 다 아는 놈이 진짜 팬 온 것처럼 대응하지도 말라고.

“다 좋지. 며칠 전에 라디오 나온 것도 웃기고.”

“아, 그랬어?”

류청우는 웃으며 사인을 마치고, 마치 P.S를 달 듯이 가볍게 사인지 위에 글을 써서 넘겼다.

“여기.”

-다른 애들한테 바로 전해둘게. 걱정하지 마.

이건…….

“고맙다.”

“뭘.”

과연 인성과 침착함은 나무랄 곳 없는 녀석이었다.

‘리더를 잘 뽑아놨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으로 넘어갈 준비를…….

“…….”

아이템?

그러고 보니… 하도 상황이 지랄맞게 돌아가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내가 지금 손에 뭘 들고 있다.

‘…쇼핑백.’

안 좋은 예감이 든다.

하지만 이걸 안 주면… 내가 이놈 하루를 정확히 따라 하지 못해서, 미션 실패 해제가 어긋날 수 있다는 그 판단.

그것 때문에 나는 군말 없이 백 안에 손을 넣었다.

보기 편하게 ‘류청우’라고 택까지 붙여 놨다. 팬사인회 중에 혼잡해서 못 찾을까 봐 한 건가.

‘아무러면 어떠냐.’

나는 거칠게 소품을 꺼냈다.

그건…… 갓이었다.

“…….”

그 조선 시대 그거.

‘근데 무슨 디테일 고증을 이렇게까지 했냐.’

이거 관리들이 쓰던 전립인가 하는 그 갓 아니냐? 이런데 쓰라고 내가 복권을 당첨…… 아니다. 본인이 행복하다면야 됐다.

내가 줘야해서 문제지.

“아, 이거 쓰면 돼?”

그래라.

류청우는 알아서 자기가 직접 갓을 가져다가 머리에 얹었다.

내 앞 순번이었던 햄스터 머리띠 쓴 고등학생이 순간 옆에서 엄지를 치켜든다.

“완전 찰떡이에요…!”

제가 고른 게 아닙니다.

“하하, 고마워, 형.”

어쨌든… 첫 멤버, 류청우에게 사인받기는 무사히 완료된 것 같다.

“또 와.”

안 와.

하지만 바로 류청우 다음 타자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게 바로 박문대였기 때문이다.

내가 핑계 대며 대기 시간을 끌라고 한 것을 착실히 이행한 덕에, 그놈은 지금에서야 내 앞 사람 사인을 막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박문대’에게 하는 인사말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덜 떨린다.

게다가 류청우를 대할 때보다도 태도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박문대 팬이 아니란 뜻이다.’

다행이었다.

나는 큰달에게 대응 문구를 팝업으로 띄우면서도 약간 안도했다.

박문대에게 별로 관심 없을 테니, 큰달이 대충 친절하게 하면 비비고 넘어갈 수 있겠…….

“아 맞다, 저기… 저 그 티벳여우 표정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

이건… 내가 지시해 줄 수 없는 부분인데.

결국 나는 큰달이 최선을 다해서 무표정한 무언가를 따라 하기 위해 애쓰는 꼴을 물끄러미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평소에 저런 표정인가 보다. 반성하겠다.

그리고 곧 녀석은 무너졌다.

“죄, 죄송해요… 좀 어색했죠.”

‘오.’

그런데 그것도 제법… 음, 역시 원래 몸 주인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군.

“…!! 아뇨! 귀여웠어요! 오빠 완전 귀여워요!”

“…?? 감사합니다….”

‘너 이쪽 일 한번 해볼 생각….’

‘아니다.’

7급 붙은 로또 당첨자한테 헛바람 넣을 뻔했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자리를 이동했다.

털썩.

그래서 이제 나는… ‘세계제일 사과말랑이’라는 말풍선 모자를 쓰고 강아지 귀를 단 박문대 앞에 앉아 있다.

본인 대면.

굉장히 희한한 기분이다.

하지만 우리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어디 보자.’

나는 양손을 깍지 끼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 문대 씨… 평소에 정말 응원하고 있어요.”

“푸흑.”

“저기, 데뷔 전부터 제 최애세요! 아, 이렇게 쓰는 게 맞죠…? 최애!”

“예…. 맞습니다. 감사합니닥…….”

방금 발음이 뭉개진 것 같지만 양호했다. 이대로만 가면 될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놈 내 사인을….

“사인… 여기 있습니다.”

아주 그럴싸하게 잘 쓰는군. 이젠 놀랍지도 않다.

‘따로 연습했냐.’

아, 그런 거였나.

아무튼, 나는 정다운 팬사인회 대화를 계속했다.

“진짜! 감사합니다. 저, 다음 활동도 꼭 챙겨볼게요…!”

물론 아이템도 잊지 않았고.

“그리고 혹시… 이거 써주실 수 있을까요? 헉, 싫으시면 안 쓰셔도 괜찮고요!”

“……싫을 리가요. 귀엽네요.”

최선을 다 해봤다.

나는 큰달이 자신의 머리 위로 금색 왕관을 간신히 올리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

나 자신에게 사인받기 완료.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멤버들이군.

내가 큰달에게 사인받는 사이에 류청우가 다른 녀석들한테 뒤쪽으로 속삭인 것을 보긴 했다.

그리고 박문대의 옆자리는 바로… 배세진이다.

‘침착한 녀석이니 초반 타자로 괜찮군.’

나는 의자를 옮겼다.

그러자 배세진이 움찔했다.

“…….”

“…….”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이미 소식을 전해 듣긴 한 모양인데, 왜 이렇게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냐.

‘연기라고 생각을 안 해서 그런가.’

그럼 좀 분위기라도 푸는 편이 낫겠지.

나는 순간적인 판단 끝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기억하세요? 그때 화장실에서 인사드린 적 있는데…….”

“…! 아, 아, 예.”

“그때보다도 더 멋있어지셨어요.”

“감사합니다….”

배세진은 좀 놀란 것처럼 나를 훑어보았다.

‘긴장 풀렸냐.’

그러나 녀석은 도리어 뭔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침을 삼키고 사인지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저, 그때 큰 힘이 됐습니다. 사실 제 팬이 아니라고 하시더라도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꼭 고맙다는 말을 드려보고 싶었습니다.”

“…….”

“오늘 팬사인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To. 류건우’로 사인을 완성한 배세진은 사인지를 내밀었다.

‘나 참.’

“저야말로 꾸준히 활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세진 씨 팬 맞고요.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예.”

나는 배세진과 악수했다.

제법 힘찬 느낌이었다.

‘괜찮군.’

그렇게 녀석과의 대화가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이번에도 하나 남았다.

‘아, 아이템.’

그래서 쇼핑백을 뒤지자 나온 것은….

‘…햄스터 머리띤데.’

나는 고개를 들어, 배세진을 보었다.

“…?”

“아뇨.”

이미 배세진의 머리에는… 햄스터 머리띠가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아까 고등학생의 머리에 있던 그거 말이다.

‘겹치는군.’

큰달의 아이템은 도로 쇼핑백에 넣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눈치싸움에서 패배한 순간 끝난 승부다.

그렇게 나는 다음 녀석에게로 넘어갔다.

팬사인회, 중앙에 앉은 녀석은 바로….

“안녕하세요…!”

선아현이다.

선아현은 제법 믿음직한 얼굴로 앉아 있다.

지난 라디오 경험을 돌이켜봤을 때, 이 녀석과 별다른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사람 놀려먹을 놈도 아니고.

나는 약간 긴장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네, 안녕하세… 큼.”

다만 긴장 상태로 몇 분 떠들어서 그런지 헛기침이 나왔다. 그래서 빠르게 목을 가다듬는데….

선아현이 허겁지겁 자신의 옆에 있던 새 음료를 집어다가 건넸다.

“…! 물, 여기… 아, 녹차도 있어요…!”

갑자기 역조공을?

‘잠깐.’

순간 사이버 렉카 타이틀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선아현 팬 차별 논란] 팬싸에서 머글 남자만 특별대우한 선아현?

안 된다.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좀 긴장해서 그래요. 제가 테스타 데뷔 전부터 팬인데 팬사인회 오는 건 처음이라서요.”

“아….”

선아현이 황급히 물을 치웠다.

‘안 돼.’

분위기 어색해지는 것도 안 된다. 안 그래도 회장에 성인 남성이 거의 없는데 더 눈에 띌 순 없다고.

나는 결국…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기 위해 ‘그것’을 선택했다.

“그보다 혹시 이거 써주실 수 있을까요.”

바로 아이템 선지급이다.

“……그럼요.”

선아현은 머뭇거리며 사슴뿔이 달린 화관을 받아다가 머리에 썼다.

“아아악!”

“아현아! 여기!”

뒤에서 온갖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납득했다. 기가 막히게 어울리긴 했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샀냐.’

‘…?’

진짜 물어본 건 아니었다만, 뭐 알았다.

어쨌든 나는 일부러 몸을 살짝 돌려서 선아현 홈마들이 컷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한 다음, 선아현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그리고 사인지에 녀석이 남긴 글을 읽으며 시간이 끝났다.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요. 앞으로도 더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화이팅!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뜻이다.

이다음은….

“안녕하세요~”

“예.”

큰세진이니까.

놈이 싱글벙글 싹싹하게 웃었다.

그리고 사인지에 보지도 않고 펜을 움직이며, 굳이 입도 같이 움직이는 스킬을 선보이는 중이다.

“와~ 어떻게 오셨어요?”

“테스타 팬이라서요.”

“어휴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 팬이세요?”

“문대요.”

“큽.”

큰세진이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속으로 무수한 ‘ㅋ’이 지나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더 열받는…… 아니, 참자.

“와~ 두 분 좀 닮으신 것 같아요!”

“아 진짜요? 생전 처음 듣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왜요! 원래 사람은… 크흡, 자기 닮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잖아요~ 왜 그런 말도 있고!”

큰세진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팬이다~”

“크흡!”

옆에서 김래빈이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사인지에 뿜는 것은 피한 모양이다.

“…….”

나는 심호흡했다.

그리고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저는 올팬입니다.”

“흡.”

웃지 마.

“세진 님 팬이기도 하고요. 세진 님도 문대랑 많이 닮으신 것 같아서 그런가.”

“…….”

“응원합니다. 워낙 다방면으로 멋지시기도 하고.”

“…아, 네. 음~”

큰세진은 결국 좀 멋쩍은 표정으로 양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이긴 기분이군.

나는 놈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왔다.

김래빈.

녀석은…… 진지했다.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누가 보면 협박당하는 줄 알겠군.

아무튼, 뭘 말하든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녀석에게 나도 진지하게 요구사항을 읊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멋진 활동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옙.”

“컨디션 관리를 위해 푹 쉬시기도 하시고요.”

“물론입니다.”

“기왕이면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밤 12시 이전에 좀 주무셨으면 더 좋겠는데.”

“…??”

그러다 서른 넘으면 개고생한다.

“그리고 이것 좀.”

“아, 예.”

나는 자연스럽게 봉투에서 ‘김래빈’이라고 이름표가 붙은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이쯤 되니 관록이 붙었는지 체념한 건지는 모르겠다.

‘이제 이걸 건네면…….’

“…….”

“……음.”

근데 이게 뭐냐.

무슨 허연 실리콘 덩어리 같은 게….

“아, 귀에 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이어커프인가 봅니다.”

하마터면 주는 놈이 물건 정체를 모르는 이상한 상황이 될 뻔했다.

나는 김래빈이 뽀송뽀송한 천사 날개를 귀에 다는 것을 확인하며,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지막 타자만 남았다.

“Hi~”

차유진.

이미 내 전 사람과 손깍지까지 껴가며 끝내주는 팬사인회를 즐긴 놈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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