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Mắt Hay Ra Đi Raw - C275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75화
방송국 복도에서,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도 아닌데 참가자를 굳이 마주쳤다?
뻔했다.
‘일부러군.’
방송에 쓸 그림을 뽑기 위해 스탭들이 저놈들을 이쪽으로 유도한 것이다.
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테스타가 출연하지 않은 것을 이런 꼼수로 때워 볼 수 있지.
그리고 여기서 인사할 때 찍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꼴이 우스워진다.
그냥 자기들이 출연 영상을 찍는 건데 우연히 마주친 우리를 모자이크해 달라고 하는 건 유난 같지 않은가.
결국 이 상황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이거다.
‘카메라.’
카메라가 쭉 깔렸다.
선아현은 하필 방송 송출을 조건으로 끼고 채서담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망할.’
나는 다른 놈들에게 눈짓했다. 눈치껏 사교성 좋은 놈들이 치고 나와서 먼저 인사를 받아준다.
“오~ 안녕하세요!”
“응원합니다. 화이팅!”
이 정도면 됐다.
인원이 7명인데 선아현은 고개만 끄덕여도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쪽으로 도는 두세 대의 카메라를 의식하며 허리를 숙여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이쯤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쪽은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저 진짜 테스타 선배님 완전 팬이에요!”
“어떡해……. 와씨.”
“선배님 정말 정말 죄송한데 싸인 받을 수 있을까요……?”
테스타 이름값 덕인지 참가자 중 절반쯤이 슬금슬금 다가온 것이다.
특별히 제작진에게 언질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순수하게 잘나가는 아이돌을 봐서 신난 것 같다.
그리고 카메라도 따라서 전진한다.
“…….”
길어지겠군. 좋지 않다.
나는 선아현의 얼굴을 체크했다.
다행히 동요가 드러나진 않았다. 평소처럼 크지 않게 웃는 얼굴인데, 좀 굳어 보이긴 했으나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다.
아마 특별한 돌발상황은 일어나지 않은 덕일 것이다.
맞은편의 채서담도 굳이 말을 얹지 않고 뒤에서 흐름에 묻혀 조용히 이동 중이니까.
‘……예상대로 머리가 돌아가긴 하는군.’
여기서 선아현에게 굳이 아는 척해서 친분을 과시하는 짓은 별 이득이 없으며, 위험만 증가한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다.
‘ 출연 중에도 선아현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했어.’
이 정도면 선아현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며, 어차피 본인도 손해니 입 다물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놈 혼자만의 판단이다.
제작진은 다르겠지.
“그러고 보니 두 분 같은 학교 출신 아니세요?”
이렇게 된 이상, 방송국 놈들이 이 먹잇감을 안 놓칠 줄 알았다.
이름 있는 아이돌의 친분은 언제나 분량이 쏠쏠히 뽑히는 그림이니까.
“아.”
채서담은 머리가 돌아가는 놈답게 먼저 선수 쳐서 얌전하고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 가끔 인사 정도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뒤는 약간 머쓱한 듯이 ‘그럭저럭 안면 있는 상대’에게 말하는 것 같은 투다.
‘이 새낀 어지간히 가증스럽네.’
선아현이 여기서 얼굴을 굳히면 ‘뜨니까 사람이 변했다’ 프레임으로 갈 걸 짐작했나 보지?
그래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선아현과 웃으며 인사하고 ‘그럭저럭 안면 있는 사이’라는 걸 증명하는 영상이라도 하나 남겨두려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업계가 그렇게 공정히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유심히 놈을 쳐다보았다.
‘여차하면 제작진한테 딜이라도 걸어서 데이터는 삭제할 수 있어.’
테스타는 참가자가 아니라 이미 회사와 계약한 아이돌이라서 말이다. 그것도 T1 산하로.
정 안 되면 차라리 방송에서 아예 이 그림을 못 쓰도록 대놓고 막말해도 그럭저럭 무마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저기요. 얘 물건 훔쳤던 건 돌려주시면 좋겠는데.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이런 식으로. 소문은 좀 나겠다만 한 건 정도야 뭐.
이 새끼가 이득 보고 선아현이 멘붕해서 상태이상 도지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낫다.
‘던질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
선아현이 차분히 응답했다.
채서담의 얼굴에 빠르게 승리감이 스쳤다.
그리고 제작진은 얼른 끼어들어서 새 방송 분량을 챙겼다.
“혹시 응원하는 말씀 하나 부탁드려도 되나요?”
“아, ……그건.”
선아현은 살짝 심호흡하는 것 같았다. 채서담은 실실 웃으며 상황을 기다렸다.
“저거…….”
“잠깐.”
나는 뒤에서 욱하려는 배세진을 잡는 류청우의 작은 속삭임을 들었다.
그리고 선아현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채서담을 보며 말했다.
“어떤 일을 하든, 좀 더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하길 바라요.”
선아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오니까,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신뢰하는 거요.”
“…….”
채서담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선아현은 아예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리고 채서담과 대놓고 눈을 마주쳤다.
“우리가……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을, 좋은 마음으로 헤쳐나가길 바라요.”
“…….”
“그러길 기도할게요.”
덕담이었다.
다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본인에게는 또 다르게 들렸겠지.
음, 이런 느낌으로.
-열등감 때문에 남 공작질할 시간에 너 자신이나 신경 쓰면서 착하게 좀 살아라.
‘굳었네.’
나는 놈의 눈깔에서 당혹과 긴장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꽤 유쾌했다.
선아현은 주변을 돌아보며 약간 쑥스러운 것처럼 외쳤다.
“그, 다른 분들도요. 화이팅……!”
“네! 화이팅!”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다른 참가자들을 보며, 선아현은 작게 손을 들어 화이팅 제스처를 만들었다.
편안해 보였다.
채서담은 겨우 따라 웃는 것 같았으나 썩 편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부득불 손을 내민다.
“……좋은 말 고마워.”
“으응.”
선아현은 악수를 마주 받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흔들었다.
“아, 저희도 뭔가 메시지를 남길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희야 너무 감사하죠!”
빈틈이 생기자 얼른 끼어든 큰세진이 흐름을 틀었다.
그리고 참가자들과 제작진의 열렬한 성원과 함께 짧게 응원 촬영이 진행되었다.
그 틈을 타 선아현은 뒤로 빠졌다.
“괜찮아?”
“……응.”
선아현은 작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딘가 후련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저희가 이제 진짜 이동해야 한다고 매니저님이 그러셔서요.”
“네넵, 감사했습니다.”
“에이 뭘요. 그럼 저희 다음엔 무대에서 뵙겠습니다~”
다른 멤버들은 각자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짧은 말을 찍고 나서야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각자 복도에서 갈라지던 순간, 나는 채서담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
노려보려던 것인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한다.
‘충격이 컸나 보지.’
현 시즌에서 1위니 이 정도면 충분히 붙어볼 만한 체급이라고 자신했나 보다.
원래 참가할 땐 그 프로그램이 전부 같거든.
‘선아현보다 프로그램에서의 성적이 좋다고 우월감이라도 가졌나.’
그래서 선아현이 또 밀리고 설설 길 줄 알았는데, 도리어 협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미치겠지.
나는 놈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운 좋은 새끼.’
“……!”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만, 저놈 하는 꼴을 보니 생각보다 감정적이라 얼마 못 갈 것 같아서 말이다.
부담이 없어 좋군.
나는 목 뒤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가 카메라 앞에서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테스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를 다 걸어 대기실에 도착했다.
“전 얼른 점심 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달칵.
그렇게 문이 닫히고, 멤버만 남은 뒤.
“후……!”
긴장이 풀렸는지, 선아현이 숨을 뱉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시원한 반응이 쏟아졌다.
“이야 아현이~”
“WOW!!”
“침착하게 잘했어.”
선아현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내심 뿌듯한지 얼굴이 좋다.
배세진까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놈한테 한마디 잘 해줬어.”
“네? 그, 한마디 해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그렇게 들렸을까요?”
선아현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게져서 고개를 숙였다. 배세진은 약간 당황했다.
“어, 그래?”
“네……! 그냥, 솔직한 생각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그런 말을 직접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선아현은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신기해요. 무, 무서울 줄 알았는데.”
나는 물었다.
“어땠는데.”
“생각, 보다…… 괜찮았어. 응.”
선아현은 자신의 두 손을 마주 잡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만나보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확실히 들어서.”
“…….”
내 우려와는 달리, 선아현에겐 이 만남이 일종의 각성이 된 것 같다.
더 이상 힘들지 않다는 걸 직접 체감한 것이다.
“나는…… 괜찮았어.”
선아현은 확신하는 것처럼 말을 끝마쳤다.
“……그래.”
“그러면 됐지~!”
큰세진이 놈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른 멤버들도 흐뭇한 얼굴로 선아현을 둘러싼다.
그때, 류청우가 미소와 함께 말한다.
“그러고 보니까 방금 아현이, 편하게 말하면서 거의 안 더듬지 않았어?”
“……!”
“그러게!”
트라우마가 가신 게 도움이 됐나?
선아현이 화색이 되었다.
“지, 진짜요? 그, 그랬던 것 같…… 아앗.”
……라고 생각하자마자 의식했는지 도로 더듬는다.
그러자 서로를 돌아보던 멤버들이 황급히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 뭐 어때 아현아~ 뭐 편하게 말하다 더듬을 수도 있지!”
“우리끼린데 그냥 편하게 하자.”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차유진은 그냥 대충 어휘를 고르면서도 잘 말하면서 삽니다.”
“저 완전 잘 말해요!”
“그래, 그래.”
중간에 이상하게 논점이 흐려지긴 했지만, 어쨌든 의도는 잘 전달되었는지 선아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목소리는 약간 먹먹하게 들렸다. 하지만 직후엔 고개를 들고 꿋꿋하게 말했다.
“그래도…… 더 연습해서! 펴, 편할 때도 더 잘 말할 수 있게, 할게요!”
“그래. 그건 응원할게.”
대기실은 그렇게 훈훈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좋아졌다.
‘잘됐네.’
나는 선아현의 등을 두드렸다. 확실히 기특한 놈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고마워……!”
선아현은 한결 편한 얼굴로 웃었다.
* * *
재밌는 점은, 이후 정말로 선아현이 공식 석상에서 좀 더 편하게 더듬지 않고 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압박감, 긴장감의 해소가 도움을 준 모양이다.
“서, 선생님께서도 계단식으로 나아질 거라고 하셨는데, 한 칸 올라간 느낌인 것 같아……!”
“그래, 축하한다.”
그리고 이번 주 는 적극적인 선아현을 포함해 다 함께 시청했다. 마침 순위 발표식이었다.
[1위는…… 채서담!]
“헐.”
놀라긴.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화면을 보았다.
지난 화에 ‘팀원 때문에 고통받는 채서담’ 분량이 들어간 덕에 기세가 더 붙었으면 붙었지, 떨어지진 않았을 테니까.
[채서담 :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거실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머, 먹을래 문대야?”
“그래.”
“땡큐 아현~”
건조 사과칩을 멤버들에게 나눠주는 선아현의 얼굴은 깨끗했다.
아마 이대로 채서담이 1위를 해서 아이돌로 성공한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진 않을 것 같았다.
‘뭐, 잘된 일이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대로 넘어가긴 내가 찝찝하지.
그리고, 미리 깔아둔 미끼들이 물고기를 가지고 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미리내 말이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며 빠르게 이야기를 본론으로 끌고 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지난번에 말씀드린 건으로 전화 주신 건가요.”
-옙! 그…… 이번 팀전 촬영에 오늘 참여하고 지금 귀가했습니다!
순위 발표식이 지금 나오고 있으니, 딱 지금 며칠이 촬영 기간일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는 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도 이렇게 당일에 망설임 없이 전화할 정도의 건이라니.
“혹시 뭘 보셨나요.”
전화 너머 미리내 2위…… 그러니까, 박민하가 숨을 골랐다.
-이거…… 후. 그게요.
“예. 말씀하세요.”
-그, 저희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분이요. 자연스럽게 저희 번호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
잭팟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75화
방송국 복도에서,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도 아닌데 참가자를 굳이 마주쳤다?
뻔했다.
‘일부러군.’
방송에 쓸 그림을 뽑기 위해 스탭들이 저놈들을 이쪽으로 유도한 것이다.
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테스타가 출연하지 않은 것을 이런 꼼수로 때워 볼 수 있지.
그리고 여기서 인사할 때 찍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꼴이 우스워진다.
그냥 자기들이 출연 영상을 찍는 건데 우연히 마주친 우리를 모자이크해 달라고 하는 건 유난 같지 않은가.
결국 이 상황이 내포하는 문제점은 이거다.
‘카메라.’
카메라가 쭉 깔렸다.
선아현은 하필 방송 송출을 조건으로 끼고 채서담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망할.’
나는 다른 놈들에게 눈짓했다. 눈치껏 사교성 좋은 놈들이 치고 나와서 먼저 인사를 받아준다.
“오~ 안녕하세요!”
“응원합니다. 화이팅!”
이 정도면 됐다.
인원이 7명인데 선아현은 고개만 끄덕여도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쪽으로 도는 두세 대의 카메라를 의식하며 허리를 숙여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이쯤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쪽은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저 진짜 테스타 선배님 완전 팬이에요!”
“어떡해……. 와씨.”
“선배님 정말 정말 죄송한데 싸인 받을 수 있을까요……?”
테스타 이름값 덕인지 참가자 중 절반쯤이 슬금슬금 다가온 것이다.
특별히 제작진에게 언질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순수하게 잘나가는 아이돌을 봐서 신난 것 같다.
그리고 카메라도 따라서 전진한다.
“…….”
길어지겠군. 좋지 않다.
나는 선아현의 얼굴을 체크했다.
다행히 동요가 드러나진 않았다. 평소처럼 크지 않게 웃는 얼굴인데, 좀 굳어 보이긴 했으나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다.
아마 특별한 돌발상황은 일어나지 않은 덕일 것이다.
맞은편의 채서담도 굳이 말을 얹지 않고 뒤에서 흐름에 묻혀 조용히 이동 중이니까.
‘……예상대로 머리가 돌아가긴 하는군.’
여기서 선아현에게 굳이 아는 척해서 친분을 과시하는 짓은 별 이득이 없으며, 위험만 증가한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다.
‘ 출연 중에도 선아현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했어.’
이 정도면 선아현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며, 어차피 본인도 손해니 입 다물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놈 혼자만의 판단이다.
제작진은 다르겠지.
“그러고 보니 두 분 같은 학교 출신 아니세요?”
이렇게 된 이상, 방송국 놈들이 이 먹잇감을 안 놓칠 줄 알았다.
이름 있는 아이돌의 친분은 언제나 분량이 쏠쏠히 뽑히는 그림이니까.
“아.”
채서담은 머리가 돌아가는 놈답게 먼저 선수 쳐서 얌전하고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 가끔 인사 정도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뒤는 약간 머쓱한 듯이 ‘그럭저럭 안면 있는 상대’에게 말하는 것 같은 투다.
‘이 새낀 어지간히 가증스럽네.’
선아현이 여기서 얼굴을 굳히면 ‘뜨니까 사람이 변했다’ 프레임으로 갈 걸 짐작했나 보지?
그래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선아현과 웃으며 인사하고 ‘그럭저럭 안면 있는 사이’라는 걸 증명하는 영상이라도 하나 남겨두려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업계가 그렇게 공정히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유심히 놈을 쳐다보았다.
‘여차하면 제작진한테 딜이라도 걸어서 데이터는 삭제할 수 있어.’
테스타는 참가자가 아니라 이미 회사와 계약한 아이돌이라서 말이다. 그것도 T1 산하로.
정 안 되면 차라리 방송에서 아예 이 그림을 못 쓰도록 대놓고 막말해도 그럭저럭 무마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저기요. 얘 물건 훔쳤던 건 돌려주시면 좋겠는데.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이런 식으로. 소문은 좀 나겠다만 한 건 정도야 뭐.
이 새끼가 이득 보고 선아현이 멘붕해서 상태이상 도지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낫다.
‘던질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
선아현이 차분히 응답했다.
채서담의 얼굴에 빠르게 승리감이 스쳤다.
그리고 제작진은 얼른 끼어들어서 새 방송 분량을 챙겼다.
“혹시 응원하는 말씀 하나 부탁드려도 되나요?”
“아, ……그건.”
선아현은 살짝 심호흡하는 것 같았다. 채서담은 실실 웃으며 상황을 기다렸다.
“저거…….”
“잠깐.”
나는 뒤에서 욱하려는 배세진을 잡는 류청우의 작은 속삭임을 들었다.
그리고 선아현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채서담을 보며 말했다.
“어떤 일을 하든, 좀 더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하길 바라요.”
선아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오니까,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신뢰하는 거요.”
“…….”
채서담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선아현은 아예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리고 채서담과 대놓고 눈을 마주쳤다.
“우리가……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을, 좋은 마음으로 헤쳐나가길 바라요.”
“…….”
“그러길 기도할게요.”
덕담이었다.
다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본인에게는 또 다르게 들렸겠지.
음, 이런 느낌으로.
-열등감 때문에 남 공작질할 시간에 너 자신이나 신경 쓰면서 착하게 좀 살아라.
‘굳었네.’
나는 놈의 눈깔에서 당혹과 긴장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꽤 유쾌했다.
선아현은 주변을 돌아보며 약간 쑥스러운 것처럼 외쳤다.
“그, 다른 분들도요. 화이팅……!”
“네! 화이팅!”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다른 참가자들을 보며, 선아현은 작게 손을 들어 화이팅 제스처를 만들었다.
편안해 보였다.
채서담은 겨우 따라 웃는 것 같았으나 썩 편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부득불 손을 내민다.
“……좋은 말 고마워.”
“으응.”
선아현은 악수를 마주 받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흔들었다.
“아, 저희도 뭔가 메시지를 남길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희야 너무 감사하죠!”
빈틈이 생기자 얼른 끼어든 큰세진이 흐름을 틀었다.
그리고 참가자들과 제작진의 열렬한 성원과 함께 짧게 응원 촬영이 진행되었다.
그 틈을 타 선아현은 뒤로 빠졌다.
“괜찮아?”
“……응.”
선아현은 작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딘가 후련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저희가 이제 진짜 이동해야 한다고 매니저님이 그러셔서요.”
“네넵, 감사했습니다.”
“에이 뭘요. 그럼 저희 다음엔 무대에서 뵙겠습니다~”
다른 멤버들은 각자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짧은 말을 찍고 나서야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각자 복도에서 갈라지던 순간, 나는 채서담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
노려보려던 것인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한다.
‘충격이 컸나 보지.’
현 시즌에서 1위니 이 정도면 충분히 붙어볼 만한 체급이라고 자신했나 보다.
원래 참가할 땐 그 프로그램이 전부 같거든.
‘선아현보다 프로그램에서의 성적이 좋다고 우월감이라도 가졌나.’
그래서 선아현이 또 밀리고 설설 길 줄 알았는데, 도리어 협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미치겠지.
나는 놈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운 좋은 새끼.’
“……!”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만, 저놈 하는 꼴을 보니 생각보다 감정적이라 얼마 못 갈 것 같아서 말이다.
부담이 없어 좋군.
나는 목 뒤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가 카메라 앞에서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테스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를 다 걸어 대기실에 도착했다.
“전 얼른 점심 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달칵.
그렇게 문이 닫히고, 멤버만 남은 뒤.
“후……!”
긴장이 풀렸는지, 선아현이 숨을 뱉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시원한 반응이 쏟아졌다.
“이야 아현이~”
“WOW!!”
“침착하게 잘했어.”
선아현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내심 뿌듯한지 얼굴이 좋다.
배세진까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놈한테 한마디 잘 해줬어.”
“네? 그, 한마디 해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그렇게 들렸을까요?”
선아현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게져서 고개를 숙였다. 배세진은 약간 당황했다.
“어, 그래?”
“네……! 그냥, 솔직한 생각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그런 말을 직접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선아현은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신기해요. 무, 무서울 줄 알았는데.”
나는 물었다.
“어땠는데.”
“생각, 보다…… 괜찮았어. 응.”
선아현은 자신의 두 손을 마주 잡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만나보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확실히 들어서.”
“…….”
내 우려와는 달리, 선아현에겐 이 만남이 일종의 각성이 된 것 같다.
더 이상 힘들지 않다는 걸 직접 체감한 것이다.
“나는…… 괜찮았어.”
선아현은 확신하는 것처럼 말을 끝마쳤다.
“……그래.”
“그러면 됐지~!”
큰세진이 놈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른 멤버들도 흐뭇한 얼굴로 선아현을 둘러싼다.
그때, 류청우가 미소와 함께 말한다.
“그러고 보니까 방금 아현이, 편하게 말하면서 거의 안 더듬지 않았어?”
“……!”
“그러게!”
트라우마가 가신 게 도움이 됐나?
선아현이 화색이 되었다.
“지, 진짜요? 그, 그랬던 것 같…… 아앗.”
……라고 생각하자마자 의식했는지 도로 더듬는다.
그러자 서로를 돌아보던 멤버들이 황급히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 뭐 어때 아현아~ 뭐 편하게 말하다 더듬을 수도 있지!”
“우리끼린데 그냥 편하게 하자.”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차유진은 그냥 대충 어휘를 고르면서도 잘 말하면서 삽니다.”
“저 완전 잘 말해요!”
“그래, 그래.”
중간에 이상하게 논점이 흐려지긴 했지만, 어쨌든 의도는 잘 전달되었는지 선아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목소리는 약간 먹먹하게 들렸다. 하지만 직후엔 고개를 들고 꿋꿋하게 말했다.
“그래도…… 더 연습해서! 펴, 편할 때도 더 잘 말할 수 있게, 할게요!”
“그래. 그건 응원할게.”
대기실은 그렇게 훈훈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좋아졌다.
‘잘됐네.’
나는 선아현의 등을 두드렸다. 확실히 기특한 놈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고마워……!”
선아현은 한결 편한 얼굴로 웃었다.
* * *
재밌는 점은, 이후 정말로 선아현이 공식 석상에서 좀 더 편하게 더듬지 않고 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압박감, 긴장감의 해소가 도움을 준 모양이다.
“서, 선생님께서도 계단식으로 나아질 거라고 하셨는데, 한 칸 올라간 느낌인 것 같아……!”
“그래, 축하한다.”
그리고 이번 주 는 적극적인 선아현을 포함해 다 함께 시청했다. 마침 순위 발표식이었다.
“헐.”
놀라긴.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화면을 보았다.
지난 화에 ‘팀원 때문에 고통받는 채서담’ 분량이 들어간 덕에 기세가 더 붙었으면 붙었지, 떨어지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거실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머, 먹을래 문대야?”
“그래.”
“땡큐 아현~”
건조 사과칩을 멤버들에게 나눠주는 선아현의 얼굴은 깨끗했다.
아마 이대로 채서담이 1위를 해서 아이돌로 성공한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진 않을 것 같았다.
‘뭐, 잘된 일이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대로 넘어가긴 내가 찝찝하지.
그리고, 미리 깔아둔 미끼들이 물고기를 가지고 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미리내 말이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며 빠르게 이야기를 본론으로 끌고 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지난번에 말씀드린 건으로 전화 주신 건가요.”
-옙! 그…… 이번 팀전 촬영에 오늘 참여하고 지금 귀가했습니다!
순위 발표식이 지금 나오고 있으니, 딱 지금 며칠이 촬영 기간일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는 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도 이렇게 당일에 망설임 없이 전화할 정도의 건이라니.
“혹시 뭘 보셨나요.”
전화 너머 미리내 2위…… 그러니까, 박민하가 숨을 골랐다.
-이거…… 후. 그게요.
“예. 말씀하세요.”
-그, 저희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분이요. 자연스럽게 저희 번호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
잭팟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